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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사 가는길/바위틈에서 자라는 소나무가 고고해 보인다
사나사 가는길/바위틈에서 자라는 소나무가 고고해 보인다 ⓒ 김정봉
양평으로 갈 때면 새로 난 4차선 큰길을 마다하고 굳이 구 도로를 고집한다. 한강을 끼고 돌아가는 길이 좋고 몇 가지 볼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팔당댐 부근에 한강 물줄기와 나란히 하는 철길 담에 적어놓은 낙서다. 주로 '○○ ♥ ○○', 혹은 'XX는 XX를 사랑해' 등이 적혀 있다. 이번에는 누구의 낙서가 생겼나 유심히 보는데 남의 공간을 절대 침범하는 일도 기존의 것에 덧칠하는 법도 없다. 무질서 속에 질서가 있다. 조금은 유치해 보이나 인간 본성을 보는 것 같아서 좋다.

팔당역 부근 기찻길 담의 낙서
팔당역 부근 기찻길 담의 낙서 ⓒ 김정봉
또 하나는 능내역이다. 지금은 대합실이 PC방으로 둔갑해 유명무실한 역으로 변해 있지만 거기에 들르면 마음이 벌써 정동진에 가있다. 기찻길과 그 기찻길이 한 점으로 모이는 곳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 지고 심난한 맘이 진정되기도 한다.

능내역 기찻길/정동진으로 향하고 있다
능내역 기찻길/정동진으로 향하고 있다 ⓒ 김정봉
사나사는 양평 방향으로 가다가 옥천에서 유명산·청평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들어간다. 40년 전통의 옥천 냉면집을 지나 신애리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들어간다. 신애리에서 사나사 초입에는 있을 법하지 않은 제법 넓은 분지가 나타나는데 땅의 높낮이에 따라 층을 이루고 각층마다 논배미가 아름드리 자리하고 있다.

산이 내리 뻗어 더 이상 힘을 다하지 못하여 평지를 이룬 곳이라 산으로 갈수록 땅의 높이가 높아져 층을 이루는데 각 층마다 바위를 정교하게 쌓아올린 모양이 이채롭다. 모두 자연석으로 쌓았는데 마치 벽돌을 쌓아 올린 양 틈새 하나 없다. 부석사와 불국사의 대석단을 쌓은 조상의 솜씨가 재연된 것 같다. 우리 조상들의 돌 다루는 솜씨는 일품이다. 궁전이나 종교 건축물에서 보여준 솜씨가 실생활에서도 그대로 발휘되는 것이다.

논두렁의 석축 솜씨를 사나사 돌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논두렁의 석축 솜씨를 사나사 돌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김정봉
추수를 하여 텅 빈 논, 군데군데 세워진 짚단, 집 담이 도로경계를 이룰 만큼 좁은 농로, 사이사이 운치를 더하는 느티나무, 모두 서럽게 다가오는 농촌 풍경이다. 승용차를 몰고 이런 곳을 지날 때면 마음이 항상 무거워진다. 다행히 사나사 초입에는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개운치 않은 마음을 그나마 달래준다.

주차장에서 사나사까지는 1.3km정도 된다. 때묻지 않은 계곡, 청량한 물소리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수록 다가오는 봉우리 때문에 발걸음이 가볍다. 한참을 걸으면 바위틈에서 자라 고고하게 서 있는 소나무를 만난다.

그 소나무 바로 아래 계곡쪽을 보면 철난간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나무에 서낭당의 물색(物色)처럼 적, 황, 녹색의 옷감을 걸어 놓아 흥미를 자아낸다. 계곡물 속에 바위를 둘러쳐 보호하는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이 함왕혈이다. 고려의 개국공신이고 호족세력인 함규 장군이 태어난 곳이라 전해진다.

함왕혈/물 속 구멍에서 함규장군이 태어났다고 전한다
함왕혈/물 속 구멍에서 함규장군이 태어났다고 전한다 ⓒ 김정봉
입구에 다다르면 일주문이 반긴다. 용문산 사나사라. 서울 봉은사에서 옮겨온 것이라는데 긴 다리를 하고 시원하게 서있다. 오는 길이 너무나 호젓하여 세속의 번뇌는 온통 씻기어 사라진 듯한데 일주문을 통과하는 순간 속 깊이 차지하고 있는 고뇌까지 어느덧 사라진다.

일주문/서울 봉은사의 일주문을 옮겨온 것이다
일주문/서울 봉은사의 일주문을 옮겨온 것이다 ⓒ 김정봉
일주문을 휘 돌아가면 평평한 분지가 나오고 서서히 사나사의 모습이 드러난다. 몇그루의 은행나무와 돌담이 멋을 더한다. 은행나무 밑에는 총탄 자국인지 군데군데 상처를 입은 사적비가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돌담으로 계곡과의 경계를 두고 대적광전 뒤로 용문산 봉우리가 솟아 멋진 풍광을 그려낸다. 사천왕상이 있어야 할 곳에 시골 분교의 정문 마냥 세로로 '용문산사나사' 라 적혀 있어 재미있다.

시골 분교의 정문 같다
시골 분교의 정문 같다 ⓒ 김정봉
절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삼층석탑과 원증국사 석종부도와 부도비다. 옆의 소나무는 햇볕의 양을 조절하기라도 하듯 여러 갈래로 뻗어 몸집을 부풀린 채 그늘을 드리우고 그 뒤의 돌담은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적절히 제어하여 여름엔 시원함을, 겨울엔 따스함을 준다.

삼층석탑과 원증국사 부도
삼층석탑과 원증국사 부도 ⓒ 김정봉
삼층석탑은 생김새가 단아하여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다. 고려시대의 일반형 석탑으로 지대석이 탑의 다른 부분과는 다르기 때문에 원래 자리가 어디였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자리한 위치는 절묘하여 절의 품격을 높여 준다. 1층 몸돌이 2층 몸돌과 3층에 비해 높게 조성되어 웅장하기보다는 단출해 보인다.

원증국사부도는 고려말기의 승려인 원증국사 태고 보우의 부도이다. 종 모양의 몸돌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어 단조로운 것이 절의 분위기와 잘 맞는다. 화강암에 푸른 이끼가 끼어있어 신비롭기까지 하다.

부도비는 보우의 탑비로 편마암으로 구성된 비몸의 일부가 파손되어 비문의 완전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정도전이 글을 짓고 의문이 글씨를 썼다. 비몸 군데군데 구멍이 나있는데 한국전쟁의 상흔이다.

원증국사 부도비/비문의 구멍은 한국전쟁의 상흔이다
원증국사 부도비/비문의 구멍은 한국전쟁의 상흔이다 ⓒ 김정봉
사나사는 신라 경명왕 7년(923)에 고승인 대경대사가 제자 융천스님과 함께 창건했지만 임란과 한국전쟁 그리고 1907년 의병과의 관군의 충돌의 소용돌이를 이기지 못하고 흔적없이 소실됐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모두 근·현대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그래서 삼층석탑, 부도와 부도 비는 이 절에서 더욱 빛나는 것이다.

대적광전의 풍경
대적광전의 풍경 ⓒ 김정봉
사나사를 한바퀴 돌고 대적광전 옆에 매달려 있는 풍경을 보고있으면 어지럽던 마음이 정돈 되고 마음의 때가 벗겨지는 것 같다. 시름은 사나사에 버리고 나 몰라라 뒤돌아 오니 사나사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이 글도 올리지 말아야 되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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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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