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틈바구니에서 시들어 가고 있는 영혼을 노래했던 두 번째 시집과는 달리 이번 시집의 씨실과 날실을 이루고 있는 언어들은 놀랄 만큼 차분하고 담담하다. 시인이 품고 있는 삶에 대한 아픔이 마치 창호지에 비치는 햇살처럼 투명하게 읽는 이의 마음에 스며든다.
두 번 째 시집 <종이꽃>에 담겨 있던 삶과 죽음에 대한 직정적인 언어를 지양하는 대신 여리고 사소한 식물이나 나무 따위에 기대어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투사하는 원근법을 적절히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시인의 이런 변화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무심히 지나치는 작은 것들에
마음을 열어 귀를 열어 꽃피워 보겠다고
기품있는 향기 품어 이름 한 번 남겨 놓겠다고
스스로를 붙박아버린,
가 닿을 곳 없는 생의 투망질이여
'나도풍란'
그의 두번 째 시집인 <종이꽃>에 실려있는 '나도풍란'이란 이 시는 이미 시인의 그러한 변모를 예고하고 있었던 셈이다. 어디에도 가 닿을 길 없는 생의 투망질을 계속하던 시인은 마침내 '희망'이란 낯선 곳에 닿는다. 그 곳은 죽음이라는 암묵의 세계가 아닌 맑고 투명한 신생의 세계이다.
독오른 쐐기풀
시퍼런 낫에 베여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고
뿌리째 뽑혀도 스스로 터뜨린 씨앗
하늘 향하여 길을 낸다
'희망'
그러나 애써 도달한 그곳에서마저 시인은 지상으로 난 길을 내지 못한다. 아주 많은 것들을 금지하고 있는 생은 그에겐 단지 하늘을 향하여 길을 내는 것만을 허용할 뿐인 것이다.
불끈
시퍼렇게
힘줄 솟은
갈퀴손
빈 허공 한 줌 움켜 잡으려
버둥거리다
숨을 놓친다
희디 흰 꽃잎들 낭자한
곡소리
천지에 자욱하다
'슬픈 자스민'
시인은 결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한줌의 허공을 바랄 뿐이다. 짧게 끊어낸 행간과 행간 사이에 귀 기울이면 마치 텅 빈 삶의 한 줌 허공이나마 움켜 잡으려고 사뭇 가쁘게 몰아쉬는 시인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시인은 버둥거리기만 할 뿐 끝내 숨을 붙잡지 못한다. "버둥거리다/ 숨을 놓친다"라는 귀절 앞에다 '번번이'라는 부사를 들이밀면 그 의미는 더욱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러니까 '슬픈 자스민'이란 이 시는 결국 시인 자신이 그리는 시인의 자화상인 셈이다.
꽃은 졌는데
떠나지 못하네
물소리에 홀려
서늘한 바위틈 비집고
더듬이 치켜들지만
울울창창한 그늘만
깊어지네
아직도
자신의 영혼 옮겨심을
꽃 한 송이 찾지 못한
변방의 歌客(가객)
지울 수 없는
나비病(병) 안고
소름돋는 한 시절
견디고 있다
'소리 깊은 집' 7
이 세번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소리 깊은 집'은 숲을 의미한다. 이미 꽃이 져버린 숲을 차마 떠나지 못한 시인은 아직도 "자신의 영혼 옮겨심을/꽃 한 송이"를 찾고 있다. 그것을 두고 시인은 스스로 '나비病'이라 칭하기도 하고 또 자신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변방의 가객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부를만한 마땅한 노래가 주어져 있지 않다. 목은 잠기어 있고 가슴은 쉽사리 열리지 않는다, 그렇게 쉽사리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 소리는 점점 마음 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집을 짓는다. 그러니까 '소리 싶은 집'은 숲이기도 하며 동시에 삶에 대한 소리가 웅성거리고 있는 시인 자신의 마음이기도 한 것이다.
마음의 골방엔 새앙쥐가 산다
밑빠진 언어의 푸대 자루 쌀 알갱이 훔쳐 먹으며
부지런히 들락날락
밤낮으로 정신 없지만
아직도
집 한 채 짓지 못 했다
'마음의 골방'
시인이란 존재는 골방에 숨어살며 '밑빠진 언어의 푸대 자루 쌀 알갱이 훔쳐 먹으며' 사는 존재이다. 그는 '아직도/ 집 한 채 짓지 못했다"라고 자탄한다. 그가 짓지 못한 집이 언어의 집인지 혹은 마음의 집인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다만 시인이 완성을 꿈꾸지 않길 바랄 뿐이다. 끝을 추구하지 않기를 희망할 뿐이다. 詩든 詩가 아니든 세상일이란 끝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점점 더 막막해지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저 시인이 병마를 이기고 자신만이 가진 튼튼한 언어로 세상을 담금질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