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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경고 학생들이 류시화 시를 낭송하고 있다.
ⓒ 정영관
어머니

어느 날, 어머니의 손을 보았습니다.
뽀얗고 매끄럽던 손이
이제는 예전이 그립다는 듯
많이 아파 보였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의 머리를 보았습니다.
검고, 윤기 날만큼 빛나던 머릿결이
이제는 예전이 그립다는 듯
하얗게,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 눈물은 마치 마음이라는 강물에서
서서히 흘러내리는 슬픈,
물줄기처럼 흘러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 고왔던 손도, 빛나던 머릿결도
예전으로 돌릴 수 없을 테지만
어머니의 얼굴에서
슬픈 물줄기처럼 흘러내리는 눈물 대신
언제나 밝고 환한 미소만
지어드리게 하고 싶습니다.

<원경고 2학년 정수민의 시>


겨울도 깊어가고 한 해도 서서히 저물어 가는 12월 22일 밤, 겨울 바람이 거침없이 불어 더욱 황량한 느낌을 자아내는 경남 합천군 적중면 황정리 너른 벌판, 그 위에 서 있는 원경고등학교가 겨울방학을 하루 앞둔 전야제로 '제 1회 시 낭송의 밤'을 "겨울과 사랑, 그리고 시와 음악 속에서"라는 주제로, 원경고등학교 기숙사 5층 강당에서 열었다.

'시 낭송의 밤'은 올 한 해, 참 열심히 살았던 교사들과 학생들이 47일간을 서로 헤어져야 하는 겨울 방학을 맞이하면서, 그 아쉬움과 서운함을 달래기 위해 교사들이 기획하고 마련한 행사이다. 교사들은 애초에 방학식 전야제를 다과회 정도로 하여 한 해를 돌아보자고 생각했는데, 그냥 단순한 다과회가 아니라, 전야제를 아이들에게 감동과 추억을 주는 행사로 발전시켜보자는 구상으로 '시 낭송의 밤'을 준비하게 되었던 것이다.

행사 2주일 전부터 공고를 하여 시 낭송에 참가할 학생들 11명의 신청을 받고, 애송시와 자작시, 또 그에 맞는 배경음악을 선정했다. 그리고 찬조 출연해줄 분들을 섭외하고, 조명 기구를 대여한다고 바빴다.

아울러, 학교 근처 논두렁과 저수지 주변에 피어 있는 억새를 한 아름 베어와 항아리에 담아 무대에 올리고, 작지만 카펫도 깔아 그 위에 원목 탁자와 의자랑 예쁜 1인용 소파를 올렸으며, 대나무가 그려진 발을 걸치고, 시화 판넬과 작은 성탄 트리와 깜빡이 전구, 그리고 '풍선 아트'를 지도하는 고미경 교사가 대형 풍선 산타와 눈사람도 설치하여 그럴 듯한 무대를 꾸몄다.

풍성한 다과와 귤과 떡을 먹으며, 필자와 2학년 박은총 학생의 사회로 시작한 '시 낭송의 밤'은 아름다운 음악 선율과 주옥 같은 시들의 잔치였다. 합천읍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정명화씨의 '마법의 성' 연주를 시작으로 백윤정, 심영보 교사가 합동으로 여는 시,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를 낭송하였고, 한성아, 권소희 학생이 박노해의 '너의 하늘을 보아', '뱃속이 환한 사람'을 낭송하여 막을 열었다.

그리고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도 올라가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과 용혜원의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을 낭송하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특히 2학년 김지은 학생은 동료 학생 정수민의 자작시 '어머니'를 애절한 음률과 함께 낭송하여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2명씩 짝을 지어 나와서 박노해, 정호승, 류시화, 안도현, 윤제림의 사랑 시를 낭송하였고, 교사들은 남녀 각각 4명씩 나와서 정호승의 '우리가 어느 별에서', 류시화의 '누구든 떠나갈 때는', 그리고 정일근의 '바다가 보이는 교실 9-첫눈'을 낭송하였다.

이번 '시 낭송의 밤' 엔 찬조 출연한 분들의 도움도 참으로 컸다. 합천에서 활동하는 통기타 동호회 <음악여행> 노래 팀들이 대거 출연하여 '눈 오는 밤' 등 3편의 노래를 불러주었고, 합천 문학회 회장을 역임한 쌍책 중학교 손국복 교사는 유치환의 '생명의 서'와 필자의 졸시 '연어처럼'을 웅장한 목소리로 낭송하여 듣는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또한 진주에서 사업을 하는 박홍란씨는 신동엽의 서사시 '금강' 중에서 동학 농민군이 척양 척왜를 외치며 봉기하고 전투하는 대목을 낭송함으로써, 확대된 시의 영역을 보여주어 '시의 충격'을 아이들에게 던져주기도 하였다.

'시 낭송의 밤'은 모든 참가자들이 무대에 올라와 <음악여행> 노래 팀의 반주에 맞춰 '사랑으로'를 힘차게 부르며, 아이들의 환호성과 박수로 끝을 맺었는데, 교사들과 학생들뿐 아니라 교사 가족들, 합천과 인근 지역의 예술인들과 그 가족들까지 함께 하면서 일 년을 마무리짓는 원경고등학교의 한마음 잔치가 되었다.

'시 낭송의 밤'을 기획할 때,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정적이고 생소한 시 낭송을 잘 수용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도리어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정서적인 고양의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는 믿음과 쉽진 않지만 미리 포기하지 않는 도전으로 성사시킨 소중한 행사였다. 이것이 바로 대안학교의 '벤처'가 아닐까?

어렵지만 작은 시작으로 물꼬를 트고,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대안학교이며 대안교육이 아닐까? 아이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어려울 것이라고 포기하였다면 시와 음악으로 하나된 멋진 시간을 우리는 영영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날 우리는 방학식을 마치고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일일이 포옹하고 악수하고 다짐하며 헤어졌고,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모두 새로운 감동과 추억 하나를 가슴에 안고 긴 겨울 방학에 들어갔다.

우리 아이들이 연어였으면 좋겠다
돌아오기 위하여 떠나는 연어였음 좋겠다
무슨 확신이 없어도
어떤 한 소식 듣지 못해도
푸른 달빛을 뚫고 두근거리며 떠났던
우리 청춘의 치어들
넓은 세상 바다에
감당할 수 없는 사랑에 헤매고
때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 따라 서툴게 유영하다가
영혼의 살집 두툼하게 알배어
물의 뿌리 상류를 향해 돌아오는
연어였으면
연어처럼 믿음직한 막무가내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이 연어였으면 좋겠다
돌아오기 위하여 떠나는 연어였음 좋겠다
천식인 듯 다급했던 시절을 거쳐
망망한 바다 속에 길 찾는 연어
언젠가 다시 바닷빛 눈망울 깊어져
생사의 거처인 상류로 상류로 올라가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폭포조차도
그리움의 맨발로 단숨에 차 올라
마침내 거스를 수 없도록 거슬러 나아가는
연어였으면
연어처럼 회귀하는 방랑자였음 나는 좋겠다.

<필자의 시 '연어처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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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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