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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3일 청와대 앞에서 일제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이 '국적포기' 선언을 통해 정부의 관심을 촉구했다.
지난 8월 13일 청와대 앞에서 일제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이 '국적포기' 선언을 통해 정부의 관심을 촉구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우리 회원들, 나를 믿고 말없이 따라와 주었습니다. 법정에 서서 '한일협정으로 다 끝났다'고 기각하는 것을 보고 실신하면서, 돌아오지 못하는 아버지의 유골 앞에서 피눈물을 쏟으며, 일본대사관까지 가서 수도 없이 데모를 하면서, 지치고 아픈 와중에도 군소리 없이 나를 믿고 말없이 따라와 주었습니다. 나는 우리 회원들 모두가 아무런 정부의 조처없이 이대로 저 세상 사람이 되도록 결코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일제 강점하 자행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등을 담은 '강제동원 특별법' 제정이 잰걸음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이금주(84)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장이 '유서'를 통해 관련법 제정을 촉구했다.

이 회장은 지난 8월 정부가 국익을 이유로 한일협정문서를 공개하지 않자,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300여명과 함께 '국적포기'를 선언해 파장을 불러오기도 했다.

결혼 이듬해 징용으로 남편이 끌려간 이후 아직까지 생사조차 모르는 이 회장은, 15여전부터 회원들을 규합해 지금까지 일본 정부를 상대로 명예회복과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IMG2@정부의 냉대와 외면이 가장 서러웠다는 피해자와 유족들. 그들은 지금 암울한 시기 우리민족이 겪었던 수탈과 억압의 진실을 밝혀 줄 과거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작업에 한 가닥 위안을 삼고 있다. 이 회장은 '특별법' 제정에 새긴 자신의 마지막 심정을 담아 30일 국회 법사위 소속의원들에게 이 뜻을 전했다.

지난 2001년 10월 김원웅 의원을 대표의원으로 해 발의된 이 법안은 우여곡절 속에 지난 16일 국회 과거사진상규명특별위원회를 통과, 법사위 전체회의를 남겨두고 있다. 법률안은 유족들과 피해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외교통상부 등 관련부처의 이의제기로 애초 원안에서 대폭 수정된 상태.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법안 심사위에서 넘어올 때 핵심적 사항들이 많이 손질돼 이미 누더기가 됐다"며 "설령 법안이 통과된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운영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국적포기 없는 나라만들기 모임' 카페(http:cafe.daum.net./pacificwar)를 운영하고 있는 김보나(36)씨는 "의원들이 법안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데다 피해보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어떻게 다뤄질지 전망이 불투명하다"며 "유족들이 원하는 것은 피해보상이 아니라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우선"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진통을 거듭해온 강제동원 특별법은 이번 국회에서 의결되지 못할 경우 사실상 자동 폐기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등지고, 남은 사람들도 병마와 한 뿐인 그들의 눈이 지금 여의도로 향하고 있다.

[전문] 법사위 의원들께 드리는 유서

▲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장
ⓒ오마이뉴스 이국언
다음은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장이 쓴 '법사위 의원들께 드리는 유서' 전문이다.... 편집자 주


나는 23세 되던 해, 만 2년의 결혼생활 중에 남편을 일본전쟁에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9개월이 지난 후 남편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그 후 61년. 죽고 싶어도 아들 때문에 죽지 못하고 나는 남편의 주검을 가슴에 묻은 채, 미망인으로 한 많은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나는 죽은 남편의 뼈도 찾지 못했습니다. 태평양 한복판에 있는 낯선 섬 타라와에 남편의 뼈는 수천 명의 미국인, 일본인들의 뼈와 함께 발길에 차이는 하얀 돌멩이처럼 어디엔가 흩뿌려져 있습니다. 나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조선인 전몰자를 위해서는 처음으로 타라와 섬에서 위령제를 지냈습니다. 그때가 남편과 헤어진 후 50년 만에 남편을 가장 가깝게 만났던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84세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귀도 잘 들리지 않고 숨도 가쁘고 얼굴은 남편과 헤어지던 23세의 뽀얀 피부의 얼굴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이 주름으로 가득 찼으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죽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나를 사랑해주던 남편의 명예가 회복되는 것을 보고서야 죽겠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입니다. 태평양전쟁 때 희생되었던 수많은 조선인들의 원혼과 함께 나의 원혼도 구천을 떠돌며 조국의 무심함을 한탄하고 울면서 편히 쉬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태평양전쟁 희생자 광주유족회를 이끌고 일본에 전후처리와 공식사죄, 배상청구 등의 재판을 회원들과 함께 해오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웃고 슬퍼하고 한탄하면서 한 배를 타고 지금껏 왔습니다. 우리 노인들이 한걸음 한걸음 움직일 때마다 무심한 조국이 우리에게 한 뼘만큼 가까이 귀를 기울일 것이라 믿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조국은 여전히 냉정했습니다. 우리 노인들이 국적을 포기하겠다고 아프고 지친 노구를 이끌며 청와대를 찾아갔을 때도 우리를 냉대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우리 유족회원 여럿이 저세상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달에 한번씩 하는 월례회 때 지난달 보다 더 구부러지고 더 아픈 몸을 억지로 이끌고 모여서 "우리 절대 이렇게 죽으면 안 됩니다, 명예회복이 되는 것을 보고 죽읍시다"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내 손녀는 예의도 없이 월례회에 쳐들어와서는 "어르신들 아프시면 안 돼요, 절대로 건강한 모습으로 어르신들 소원이 성취되는 것을 보셔야 돼요!"라고, 버릇없지만 미워할 수도 없는 으름장을 놓고, 우리 노인들은 그 소리를 듣고 힘없이 "그래 그래, 걱정 말아, 우리, 법이 제정될 때까지 절대로 안 죽을게"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의원님들, 우리는 일제시대 때부터 너무나 사람대접을 못 받고 살았습니다. 징용에 끌려갔던 사람들은 살육장에 끌려간 가축과 같은 취급을 받았고, 남은 가족들은 징용에 끌려간 혈육을 그리다 미쳐서 죽기도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손가락질 받고 살았습니다. 구걸을 하다가 칼부림을 당하기도 하고, 친척들이 자기를 죽이겠다고 모의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 한겨울 맨발로 도망쳐서 살아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조국이 일제의 폭압에서 해방이 된 이후에도 우리가 겪었던 시름에 대한 위로는 커녕, 계속해서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재판을 위해 일본 법정에 서면서 "사죄하라! 내 아버지 돌려 달라! 내 다리 돌려 달라!"고 얼마나 목이 터져라 외쳤는지, 징용에 당한 우리 자신과 우리 혈육이 불쌍하고 우리 인생이 서러워서 얼마나 울부짖었는지 관심도 없었습니다.

왜 우리의 조국은 우리를 이다지도 모른체 하는 것입니까? 왜 아직까지도 우리를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돌보아줄 법안 하나를 제정해주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우리와 우리 혈육이 일제침략전쟁에 의해 입은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입니다. 이를 실현할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특별법'은 그 누구도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노인네들이 빨리 죽어 없어져서 세상이 조용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로 이 법안을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각, 나는 이 법안이 제정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유서로 남기기로 작정했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이 법안을 제정해 달라고 대한민국, 바로 나의 조국의 국회의원들께, 법사위 의원들께 간곡히 부탁하겠습니다.

의원님, 우리는 일본침략전쟁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아들을 잃었고, 누이를 잃었고, 딸을 잃었으며, 형과 아우를 잃었습니다. 우리 자신은 살아 돌아왔더라도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과 약 속에 신음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 회원들은 "아프고 낙이 없어 죽기만을 바란다"고 합니다.

16년간, 나는 그들이 '조국이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리라'는 희망을 잃지 말기를 재촉하고 용기를 주곤 하였습니다. 이제 죽기만을 바라고 있는 우리 회원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로써, 그들의 시름을 달래고 눈물을 닦을 수 있는 이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해 주시기를 의원님들께 유서로써 간청합니다.

우리 회원들, 나를 믿고 말없이 따라와 주었습니다. 법정에 서서 "한일협정으로 다 끝났다"는 기각을 듣고 실신을 하면서, 돌아오지 못하는 아버지의 유골 앞에서 피눈물을 쏟으며, 일본대사관까지 가서 수도 없이 데모를 하면서, 지치고 아픈 와중에도 군소리 없이 나를 믿고 말없이 따라와 주었습니다. 나는 우리 회원들 모두가 아무런 정부의 조처 없이 이대로 저세상 사람이 되도록 결코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의원님들께 유서로써 하소합니다. 이제 우리 노인들의 슬픔과 아픔을 거두어 주십시오. 더 이상은 우리를 방치하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 노인들도 사람이고 이 나라의 국민입니다. 진정 이 나라가 우리의 조국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 노인들을 위해 이 법안을 제정해 주십시오. 나의 마지막 소원이자 우리 일제침략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노인들을 위한 단 하나의 간청입니다.

2003년 12월 29일
태평양전쟁 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 이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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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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