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골목안 풍경>을 보던 때가 떠오릅니다. 1994년 혹은 1995년인 듯 합니다. 헌책방을 다닌 지 얼마 안 되던 때였고, 헌책방에서 이 책을 만났습니다. 어느 분이 그 헌책방에서 이 책을 찾고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헌책방 임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저도 어깨 너머로 무슨 책인가 구경을 하다가 참 좋구나, 우리 나라에도 이런 사진을 찍는 사람이 다 있구나 하면서 놀라워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이 새책으로도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나온 지 꽤 여러 해가 지난 책이었고, 헌책방에서 처음으로 만났기 때문에 헌책으로만 찾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거든요.
더구나 나중에 듣기로는 사진책은 잘 팔리지 않아 쉽게 절판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새책방에서 <골목안 풍경>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고, 때문에 반품을 안해서 새책방에 남아 있던 책을 살 수 있는 기회마저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교보문고에서 사진책을 구경하다가 나온 지 꽤 여러 해 지났는데도 `초판'으로 있는 <골목안 풍경>을 여러 권 보았어요. 헌책방에서는 보통 `초판'을 높은 값어치로 생각하지만 초판을 거의 넘기지 못하는 사진책임을 생각한다면 `안 팔려서 초판밖에 없는' 책이 무슨 자료성이 있겠냐 싶기도 합니다. 아무튼. 다행히 반품 안 되고 남은 <골목안 풍경>을 한 두 권 장만할 수 있었고, 헌책방에서도 한두 번 더 만나서 그동안 여러 권 모았습니다.
그러다가 올초 새로 나온 <골목안 풍경>도 구경은 했는데 쉽게 살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책값이 많이 올라 35000원이 되었거든요. 몇 번 입맛만 다시다가 말고, 구경만 하다가 말았습니다. 그러던 지난 월요일, 실업급여 34만 원을 받고 <골목안 풍경> 6집을 사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먹고 살기도 힘들지만 지금 아니면 못 사겠다 싶었고, 좋은 사진을 찍어온 김기찬씨와 좋은 사진책을 펴낸 눈빛 출판사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 더 좋은 사진책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2>
사설이 길어졌습니다. 어쨌거나 지금, <골목안 풍경>은 어느 새책방에서든 주문을 해서 웬만한 책을 다 살 수 있고 출판사로 연락해도 재고가 남은 책은 사서 볼 수 있어요. 그럼에도 굳이 이 책을 헌책방에서찾는 분들도 꽤 있던데, 부디 새 책으로 사서 보면 좋겠습니다. 헌 책과 새 책의 값이 얼마 차이가 나지 않거든요.
자, 이제 그러면 사진책 <골목안 풍경> 첫머리에 실린 글에서 묻던 말에 우리들 스스로 대답해야 할 때가 되었군요. 골목을 주차장으로 만들고, 골목길 가득한 동네를 재개발해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요?
…이제는 골목길이 거의 사라진 마당에 이런 사진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한 이슈이다. 단순히 `옛날에 이런 것이 있었지' 하는 회고적인 태도로 보기엔 김기찬의 사진 기록은 아직도 현재와 닿아 있는 어떤 끈을 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끈이란, 현재 우리가 골목길이 사라진 그 지점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골목이란 다 주차장이 되어 버렸으며, 김기찬의 사진 속 골목에 나오는 다양한 공간과 질감의 얽힘과 변주는 획일적인 다세대 주택의 끔찍스런 재료와 형태로 대체되어 버렸다. 그리고 아예 그 현존 자체가 사라져 버려, 골목길은 대로(큰길)가 되고, 대로는 다시 넓혀져서 6차선, 8차선의 광장 같은 길이 되어 버렸다…
<머릿글 - 이영준>
<골목안 풍경> 6집은 1972년에 찍었던 사진 속에 담긴 사람들 흔적을 좇아서 2002년까지 다시 만날 수 있던 사람들이 주인공입니다. 왼쪽에는 옛 사진이, 오른쪽에는 새 사진이 있습니다. 사람도 달라졌으나 집과 골목도 달라진 사진들이에요. 더구나 앞으로는 골목길이 자꾸만 사라지는 흐름이라 사진 속 사람들도 태어나서 자라고 살았을 그 골목을 떠나지 싶어요.
그래서 머릿글을 쓴 이영준 교수 말마따나 "골목길이 거의 사라진 마당에 이런 사진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물을 수 있고 물어야 해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하나둘 사라지는 골목길에서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을까요? 골목길이 사라지고 들어서는 아파트와 다세대 주택과 큰길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나요? 그리고 무엇을 앗아가나요?
김기찬씨가 서른 해 넘게 담아온 서울 시내 골목길들 사진을 가만가만 들여다보아요. 사진 속에서 김기찬씨를 바라보며 웃기도 하고 찡그리기도 하고 멍하기도 한 사람들 얼굴을 차분하게 들여다 보아요. 그 모습과 그 얼굴에 무엇이 있는지요? 그 모습과 얼굴은 우리에게 무엇인지요?
<3>
서울 중림동, 도화동, 만리동, 공덕동 등에서 사진을 많이 찍은 김기찬씨. 이제는 김기찬씨가 사진기를 들고 누비던 골목길은 그야말로 하나둘 사라집니다. 또한 김기찬씨가 찍었던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세상을 뜨기도 했으며 옛날처럼 쉽게 사진 찍히기를 받아들이던 사람들도 사라지지 싶어요.
유영애, 인형 업고 있는 동생을 업고 집으로 올라가는 중에 나를 만나 사진을 찍게 됐다. 몇 번이나 층계를 올라가라 내려가라 하고 부산을 떨면서 사진을 찍었지만 짜증 한번 부리지 않고 촬영에 응해 주었던 소녀가 유영애다. 사실 나는 그의 사진을 나의 첫번째 사진집 <골목안 풍경> 1집에 게재해 놓고도 그들을 찾지 못했다…<93쪽>
김기찬씨가 모방송 프로그램인 '피플 세상 속으로'라는 방송에 출연한 후로 유영애씨를 다시 만났답니다. 그 방송을 본 유영애씨가 방송사로 문의를 해서 연락처를 알았다지요. 유영애씨는 청주에서 농장을 꾸린다는데, 서른 해 만에 만나서 가슴이 참으로 벅찼다고, 다시 만나서 새로 늘어난 식구들 사진을 더 찍을 수 있어서 더 좋았다고, 더구나 다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일만 해도 반가운데 "영애씨는 자기 집 과수원에서 생산한 배로 짠 배즙을 기침에 좋다"며 선물까지 하고 갔답니다.
그래서라고 생각합니다. 김기찬씨는 <골목안 풍경> 6권 겉그림 사진을 어릴 적 유영애씨와 29년 뒤에 다시 만난 사진 둘을 함께 실었습니다.
계단집에서 만난 왕초할머니는 처음 사진을 찍은 1983년에서 열한 해가 지난 뒤에 다시 찍히며 혀를 낼름하고 내밉니다. 11년 동안 가까운 사이가 되어 김기찬씨에게 사진을 찍힐 때 일부러 놀렸답니다. 지금 그 할머님이 살아 계실까요?
<4>
…이 사진집이 지난 삼십여 년간 계속되어 온 나의 `골목안 풍경' 사진작업의 마지막이 될 것 같다. 혹자는 내가 골목에 너무 집착한다고 하지만 골목은 내게 삶을 가르쳐준 `인생의 배움터'였다. 골목은 나의 고향이었고 나의 안식처였다. 어쩌면 나는 골목에서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인생을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김기찬씨 말>
김기찬씨는 <골목안 풍경>을 마무리 하는 글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마지막일지 모르겠다고요. 사실 그렇습니다. 서울 중림동도 도화동도 공덕동도 만리동도 하나둘 재개발을 하니까요. 새로운 서울시장은 아주 부지런히 서울 시내 곳곳을 `뉴타운'으로 뽑아서 재개발을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골목길은 없고 널찍한 대로만 남을지 몰라요.
그런데 저는 이렇게도 생각해 봅니다. 김기찬씨 <골목안 풍경>은 아직 끝이 날 수 없다고요. 재개발이 되는 골목길과 공사를 마치고 확 달라진, 사라진 골목길도 찍어야겠다고요. 그래서 우리가 재개발과 경제발전으로 얻은 것과 함께 잃은 것을 보여주고, 돈과 물질을 얻는 만큼 자연과 풋풋한 사람사랑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고요.
사람들 살아가는 삶터가 사람도 자연도 헤아리지 못하게 바꿔놓는 우리 모습이잖아요. 이런 도시와 골목골목에서 부딪히는 우리들 평범한 삶이야말로 가장 따뜻하면서 푸근한 사진감이 되는 한편, 우리들을 즐겁게 하는 사진이 된다는 이야기를 앞으로 <골목안 풍경> 7권, 8권, 9권…. 꾸준하게 보여줄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책이름 : 골목안 풍경(김기찬 사진집 6, 1972~2002)
- 찍은이 : 김기찬
- 펴낸곳 : 눈빛(2003.3.3)
- 책값 : 35000원
- 기사를 올리기 앞서 눈빛 출판사로 전화를 걸어 보았습니다. 김기찬씨가 책 끝에 붙인 말처럼 앞으로는 <골목안 풍경>이 더 나오지 못하느냐고 말입니다. 김기찬씨가 찍어온 서울 안 골목길은 거의 모두 아파트 재개발로 들어가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 찍어온 골목길을 떠나 다른 골목길을 찍는 일이 수월치 않으며, 김기찬씨 스스로도 얼마 앞서 <골목안 풍경> 30년을 갈무리하는 사진선집을 마지막으로 더 내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답니다. 아쉽지만 우리 현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동안 참 많이 애쓰셨고,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사진 한 장을 보며 즐거워할 수 있었고, 여러 모로 사람 삶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부디 앞으로 담을 다른 사진에서도 우리들을 즐겁게 하는 이야기를 안겨 주시길 바라면서.
- 이 글은 제 개인 누리집(http://hbooks.cyworld.com)에도 함께 올려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