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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딸 지구시인 레이첼 카슨>
<지구의 딸 지구시인 레이첼 카슨> ⓒ 이유책
무언가를 처음 시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채 인식하지 못한 것의 중요성을 발견해야 하고 그것이 왜 가치있는 것인가를 밝혀내야 하며 동시에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선구자의 임무이자 그들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기쁨이기도 하다. 또한 그러한 작업은 사람들의 몰이해와 무관심, 빈정거림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마련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처음 말했거나 행하였거나 깨달은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그러한 수고에 대한 당연한 답례일 것이다.

<지구의 딸 지구시인 레이첼 카슨>(김재희 글·이유책 펴냄·2003)은 같은 이유로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이름 중의 하나이다.

"돌멩이 하나라도 있던 자리에 두는 거야"

레이첼 카슨은 "대기 오염이나 수질 오염 같은 말도 없었고 그 비슷한 개념도 전혀 없던 시절" 자연 보호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했던 최초의 인물이다. 그가 미국의 수산자원국에서 일하는 동안 열두권짜리 소책자 <자연보존 활동>을 펴낸 일은 환경 운동의 시초였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레이첼이 본격적으로 생태계 보존 운동을 시작하는 첫 번째 단계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레이첼은 음악과 책, 자연의 풍요로움을 즐기며 자랐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즐길 수 없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어머니 마리아의 영향이 더 컸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최고 교육을 받았지만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없었던 마리아는 그의 열정과 지식을 딸에게 쏟아부었다. 숲으로 나가 새와 꽃을 관찰하면서 마리아는 딸에게 돌멩이 하나라도 원래 있던 자리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레이첼의 환경 의식은 어쩌면 이때부터 싹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다로의 초대

레이첼이 처음부터 생태계 보존 운동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펜실베니아 여자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의 삶은 필수과목으로 생물학을 수강하면서부터 극적인 변신을 시작한다.

"생물학 공부가 너무 재밌어. 어제는 플라나리아 해부를 했거든. 다음 주에는 짚신벌레야. 짚신벌레는 너무 귀여워. 냄새는 좀 꿀꿀하지만 말이야."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생물학 공부를 계속하던 레이첼은 여기에서 그는 인생을 뒤흔들 만한 경험과 또 한번 마주치게 된다. 바로 우즈홀 해양생물학 연구소에서 6주간 열리는 여름학교에 참가하면서 처음으로 바다와 대면하게 된 것이다. 그는 단번에 매료됐다.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다 몇 번이나 나를 잊어버렸다. 하염없이 발길을 옮기다 보면 갑자기 무릎 위로 차가운 물결이 느껴졌다."

레이첼 카슨
레이첼 카슨 ⓒ rachelcarson.org
그는 수산자원국에서 <해저 로맨스>라는 자연 다큐멘터리의 방송 대본을 쓰면서 과학에 대한 대중적 글쓰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했다.

<바닷바람 아래서>(1941) <우리를 둘러싼 바다>(1951) <바다의 가장자리>(1955)는 그러한 인식의 결과물들이었다. 특히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출간되자마자 무려 86주 동안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고 전세계 32개국에서 번역됐다. 상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레이첼은 그해 '올해의 여성'으로 선발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 봄 그 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

그리고 그의 인생은 1956년 또 다시 중대한 국면을 맞는다. 이번에는 비단 레이첼에게만 중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 산림청이 어마어마한 양의 DDT를 공중 살포한 것이었다. DDT로 애벌레 집단이 없어지자 그의 천적이었던 거미진드기만이 살아남았고, 거미진드기들로 인해 숲이 모두 망가졌다.

레이첼은 정부와 언론에 살충제의 위험성을 여러 차례 알렸으나 그들은 '인명이 손상되었다는 사례는 보고된 바가 없으며 자칫하면 공연한 불안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살충제에 대한 책을 쓰기로 결심한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것 같다. … 하지만 어느 때보다 열망은 뜨겁고 간절하다. 내게 남은 열정을 모두 바쳐 이 책을 마무리하고 싶다."

레이첼은 봄을 알리는 소리가 멈추어 버린 섬뜩한 어느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추적해 가면서, 살충제의 무서움을 상세히 묘사한다. '생태학운동의 기점'이자 '에코페미니즘의 원점'이라고까지 평가되는 <침묵의 봄>(1962)은 이렇게 쓰여졌다.

지구의 딸 지구시인 레이첼

<침묵의 봄>은 예상대로 많은 사람들-특히 농약업자들-의 공격을 받았으나 1963년 대통령 과학자문위원회 보고서에 의해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침묵의 봄>은 레이첼 자신에게는 예술원회원(회원 50명 중 네 번째 여성 회원이었다) 자격과 슈바이처 상을 받는 영예를, 사회에는 환경 운동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1964년 레이첼은 쉰여섯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그러나 레이첼은 세계 곳곳에서 다시 태어났다. '레이첼 카슨 환경운동본부'가 만들어졌고 레이첼이 거닐던 숲은 '레이첼 카슨 국립야생생물 보호지역'으로 명명됐다.

그리고 정확히 10년 후 지미 카터 미대통령은 레이첼 카슨에게 최고시민훈장을 추서했다. 카터 대통령은 "그녀의 소리를 듣고 깨어난 세계의 시민들이 환경 운동을 벌일 수 있는 튼튼한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는 헌사를 바쳤다.

<지구의 딸 지구시인 레이첼 카슨>은 이러한 레이첼의 삶을 쉽고 간결한 어투로 정리했다. 저자인 김재희씨는 "고등학생인 조카 아이에게 레이첼의 이야기를 해 주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고 말한다. "시시콜콜한 가족사를 비롯해 교우 관계며 수십 명의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전"은 우리 독자에게 그다지 의미가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 말미에 덧붙여진 서강대 한징택 교수와 녹색연합 김제남 사무처장의 발문은 오늘날 생태계 위기를 걱정하는 또 다른 '레이첼 카슨들'의 고뇌를 담고 있다. 새만금 간척을 반대하며 삼보일배 순례를 한 수경 스님과 문정현 신부, 천성산 고속철도 관통을 막기 위해 단식을 해 온 지율 스님의 메시지도 함께 실려 있다.

레이첼 카슨 (1907~1964)

자연과학의 첨단 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통해 바다에 대한 지식을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 과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바다에 대해 쉽게 알 수 있도록 했다. 현대인의 고전이 된 <침묵의 봄>과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인물 100선에도 뽑힌 바 있다. 미국영재교육학회 회장 렌줄리 교수는 21세기 영재형 인간으로 레이첼 카슨을 지목하기도 했다.

그의 대표적 저서 <침묵의 봄>은 1962년 출판 당시 4만부의 선계약이 될 정도로 많은 주목을 받았고 그해 가을에만 60만부가 팔렸다. <침묵의 봄> 출판은 인류에게 환경 문제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레이첼 카슨 재단 사이트 www.rachelcarson.org 나 레이첼 카슨 교육센터 및 기념관의 사이트 www.rachelcarsonhomestead.org 를 통해 레이첼 카슨을 인터넷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지구의 딸 지구시인 레이첼 카슨 - 이유인물선 1

김재희 지음, 이유책(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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