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몸을 이끌고 지팡이에 의지해 연단에 오른 리영희 교수는 통일논의의 공허함을 질타하는 것으로부터 강연이 시작됐다.
리 교수는 "나는 통일을 이야기하거나 쓰지 않는다"며 "요즈음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과정이나 구체적인 방안 없이 추상적으로만 이야기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이러한 전제 가운데 자신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남과북의 화해, 공존, 협력까지라고 선을 그으며 이는 "전쟁 없이 살 수 있는 관계"로 귀착된다고 말했다.
"남북한이 어떤 형태의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라고 물은 리 교수는 스스로 "체제 수렴적인 남북관계의 진전"을 해답으로 내놓으며, 북한이 변하는 만큼 남한도 함께 변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풀어놓으며 자연스럽게 독일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통일과정에 있어 서독의 접근방법이 동·서독간 이질적인 역사적 체험을 인정하고, 상호존중하는 것이었다고 소개한 리 교수는 통독 후 변화한 동독지방의 두 가지 상반된 반응과 '정치 사회적 자유의 향유'와 '사회주의 시절 없었던 각종 범죄 등 반인간적 사회악의 발생'을 이야기하면서 상호존중의 방법을 추구한 독일도 통일 후 이러한 후유증을 겪는 것에 비교할 때 남북한의 관계에서는 무섭고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리 교수는 "무섭고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의 근거로 남한과 서독의 차이를 들었다.
서독은 사회주의 이념이 발생할 만큼 앞선 철학적 전통을 가진 나라로 이념에 따른 정치적 표현에 대한 알레르기가 없으나 남한은 '극우, 반공에만 기반한 국가'로 막스의 저서출판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속사유가 될만큼 닫힌, 이분법과 체제우월의 논리만이 득세하는 것이 현실이다. 상호의 통합, 나아가 통일은 꿈같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에 리 교수는 '우리도 이질화됐고, 북한도 이질화됐다'고 지적하며 남한만의 기준으로 북한만이 이질화됐다고 바라보는 것은 "남한의 자기기만적인 철학의 빈곤"이라고 말했다.
이에 리 교수는 북한의 변화와 함께 우리의 이질화를 반성하고 "우리의 문제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재통합의 용이함이나 통합 후 부작용의 예방을 위해 "북한은 많이, 남한은 더 많이 변해야 한다"고 말하며 몇 가지 과제를 던졌다.
우선 동·서독간의 '접근을 통한 상호변화'라는 방법론을 거론한 후 남북한은 몇몇 경제적 교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접근이 불가능한 체제'라며 남북 상호간 "변화를 통한 접근을 모색"이라는 역설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북한을 "김일성 우상화에 다수의 인민이 소외된 사회", 남한을 "자식을 한강에 버릴 만큼 병든 미국 자본주의 식의 극단적이고 반인간적인 사회"로 규정한 리 교수는 북한의 최근 변화노력들을 이야기하며 부패하고 병든 남한 사회의 '더 많은 변화'에 대한 방안을 내세웠다. 남한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독점, 특권, 이기적인 자본만능의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전반적이고 많은 사람들의 공통 이익을 위한 제도가 수용"을 제시하며 이에 더하여 "현존유일인 극우, 반공적인 정치지형과 소비적이고 파괴적인 인생관을 중화시켜 사회의 삶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리 교수는 강연을 마치며 다시 한번 체제우월의 논리에 대한 거부와 남북한의 상호변화를 강조하였다.
이어진 질의 응답에서 남북한 불가침과 영세중립국 선언의 현실성에 대해 리 교수는 "필요한 힘의 구조가 부족하다"며 "대단히 비현실적"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문제에 대해서는 "장래 남북의 통합 후 영토주장에 대한 예방차원이라는 긴 안목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닐까?"라며 깊은 역사적 안목을 드러냈다.
예정시간인 저녁 6시를 초과해서 끝난 강연은 강연장 근처 식당의 뒤풀이 장소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