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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티즌들의 '친일인명사전' 성금 대열에 처음 참여한 날은 지난 12일이었다.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하기 시작한 성금 행렬이 사흘쯤 되었을 때였다. 그리고 성금 액수가 1억 원을 막 넘어서던 시점이었다.
나는 성금 행위 자체도 중요했지만 왠지 1억 원을 돌파하는 시점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그 시점을 택해 성금 대열에 참여하는 것이 뭔가 더욱 의미 있고, 기분을 한결 흥겹게 해줄 것만 같았다.
작은 통장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아내와 함께 농협으로 갔다. 내 통장들과 아내 통장들 속에는 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지난해 연말에 아파트 계약에 따른 '학교용지 분담금'이라는 명목의 이상한 세금을 96만원이나 물고 이런저런 일로 지출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13일 예산과 대전과 천안을 거쳐 14일 돌아오는 새해 첫 가족나들이도 계획되어 있어서, 썰렁한 통장 속내에 한숨을 삼키며 아내와 의논 끝에 우선 3만원을 <민족문제연구소> 계좌로 입금시키기로 했다. 겨우 3만원 보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내게 아내는 "다음에 또 보내면 되잖아요"라는 말로 위로했다.
예정대로 13일 오전에 새해 첫 가족나들이 길에 나섰다. 며칠 전까지 감기를 호되게 앓으셨던 어머니는 집에 남으시고(그래서 뒷동 제수씨에게 단단히 부탁하고), 아내와 아들녀석이 동행을 했다.
예산 산성리성당에 잠시 들른 다음 대전으로 갔다. 큰처남 집에 머물고 계시는 장인어른을 찾아뵙고, 오후 3시 약속 시간에 대전기독교방송(CBS)으로 갔다. 목원대 행정정보학과 권선필 교수와 25분 동안 '대담' 녹음을 하고, 4시경 대전을 출발 천안으로 갔다.
딸아이의 원룸이 있는 언덕 골목길은 간밤에 내린 눈으로 미끄러웠다. 빙판 길을, 더구나 언덕길을 용케 올라간 것까지는 좋았다. 언덕 끝 지점에서 차를 간신히 돌려 가지고 조심조심 중간쯤 내려와서 딸아이의 원룸이 있는 집 앞에 정확히 주차를 한 것까지도 잘된 일이었다.
핸드브레이크를 최대한 당겨놓고 후진기어를 넣으니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아들녀석과 함께 앞바퀴 밑에 박아놓을 돌을 찾았다. 그 흔하던 돌이 모두 눈 속에 파묻혀서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단단히 얼어붙어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우선 짐부터 내리기로 했다. 딸아이 원룸 위층 주인집에 드릴 해미성지에서 길어온 물통을 비롯하여 이불이며 여러 가지 소소한 짐들을 내렸다. 그것들을 모두 집안으로 날라놓은 다음 다시 돌 찾는 일을 했다. 그런데 돌을 찾아 언덕길을 올라가 뒤돌아보니 내 승합차가 쭈르르 미끄러져 내려가는 게 아닌가.
내 불찰과 방심이 빚은 일이었다. 차의 바퀴들이 시멘트 포장길 결빙 위에 올라 있다는 사실을 미처 감지하지 못한 탓이었다. 차의 앞바퀴를 조금 옆으로 틀어놓고, 짐을 내려 하중이 반감되는 상태가 되기 전에 돌부터 찾아 단단히 박아놓았어야 할 일이었다.
10미터쯤 미끄러져 내려간 차는 거기에 주차되어 있던 하얀 지프의 꽁무니에 부딪쳤다. 정말 아찔했다. 둔탁한 소리에 소름이 끼쳤고, 순간적으로 연쇄 추돌 현상이 감지되어 온몸이 굳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차는 거기에서 멈춰 섰다. 지프는 결빙이 없는 시멘트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한 뼘 정도만 밀렸을 뿐이었다. 만일 그 지프가 충격을 못 이겨 미끄러져 내려갔다면 정말 삼중 사중 연쇄 추돌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내 차는 앞이 찌그러져 있었다. 그야말로 면상을 다친 형국이었다. 지프의 꽁무니를 살펴보니 깨지거나 찌그러진 데는 없었다. 그러나 꽁무니에 달려 있는 스페어타이어의 안쪽이 밀려들어가서 공기가 빠져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스페어타이어 고정판이 약간 움직이는 상태였다.
나는 딸아이가 사는 원룸 3층 주인댁으로 올라가서 해미성지 물을 드리고 주인아주머니를 내려오시게 했다. 상황을 설명한 다음 지프의 주인을 아시느냐고 물으니, 언덕 너머에 사는 잘 아는 아가씨의 차라고 했다. 그럼 지프 주인 아가씨에게 이 사고 사실을 전해주고 혹시 돈 들어갈 일이 있으면 내게 청구를 하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주인아주머니는 타이어는 찢어진 게 아니니 다시 공기를 넣으면 될 것 같고 타이어 고정판 움직이는 것도 다시 레지들을 죄면 될 것 같다면서 "깨지거나 찌그러진 데가 없으니 그냥 냅둬요"라고 했다.
"그러면 안되고요. 아주머니께서 먼저 그 아가씨에게 얘기를 꼭 해주십시오."
다시 한번 부탁을 하고, 나는 손을 털고 딸아이의 원룸 안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라고 나를 위로했다. 연쇄 추돌 사고가 발생하지 않은 것도,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것도 천만 다행이라고 했다.
"그게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인데, 만일 당신이나 한결이가 돌을 찾아서 차 앞바퀴에 괴어놓는다고 구부리고 있을 때 차가 미끄러졌어 봐요. 어떻게 되겠어요. 더 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잖아요."
옳은 말이었다. 나는 아내의 그런 말을 들으며 마누라의 성품이 나보다 한결 느긋하다는 것을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딸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그때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오마이뉴스>의 친일인명사전 성금 관련 기사를 읽고 있었다. 이미 2억 5천만 원이 넘어서고 있는 놀라운 상황에서 뜨겁고도 신선한 희열을 만끽하며 아내에게 그 사실을 전해주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딸아이에게 내 자동차 사고 이야기보다도 우선 <오마이뉴스> 기사 이야기부터 했다. 딸아이는 이미 친일인명사전 성금 대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딸아이는 놀라운 말을 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럴 줄 알았다니?"
이런 내 말에 잽싸게 대답을 한 쪽은 딸아이가 아닌 아들녀석이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아들녀석도 이미 '독립군 진공 작전'으로 표현되는 그 '놀라운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전에서 천안으로 올 때, 조금 전의 대전기독교방송에서의 대담 녹음 얘기를 하면서 내가 그 '놀라운 상황'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준 덕이었다.
내 이야기를 듣던 녀석이 국회의 '친일인명사전 편찬 지원금 5억원 삭감' 대목에서 내뱉은 한마디가 지금도 웃음을 자아낸다.
"우리나라에 그런 국회의원들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도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에요? 그런 국회의원들은 일본으로 수출을 해버려요."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딸아이와 중학교 1학년 아들녀석을 번갈아 보면서 흡족한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딸아이에게 조금 전에 있었던 자동차 사고 이야기를 했다. 그 말끝에 이런 말을 했다.
"차 찌그러진 데를 수리하려면 기십 만원은 들어갈 거야."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뭐 하러 그래요. 고치지 말고 그냥 타고 다녀요."
"왜?"
"햇수로 이제 한 5년 됐으니까 찌그러진 데가 있는 것도 괜찮아요. 사람이 한 세상을 살려면 온갖 풍상을 겪게 되고 상처도 생기듯이 자동차도 마찬가지예요. 나이와 전혀 상관없이 모습이 말끔한 것도 별로 좋지 않다구요."
"재미있는 말이군."
그때 딸아이가 더 재미있는 말을 했다.
"차 고치는 돈 아껴서 친일인명사전 성금 더 내요. 아빠가 3만원 낸 것은 너무 적어요."
나는 아들녀석을 돌아보며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저도 누나 말에 찬성이에요."
"좋다. 그럼, 집에 가서 할머니 생각도 여쭤보고 결정하자."
다음날 14일 오후에 딸아이와 함께 아들녀석을 천안에 남겨두고 나와 아내는 태안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으면서 천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말씀드렸다. 아이들 의견대로 차 고치는 비용을 아껴 친일인명사전 성금을 더 할 생각이라고 하니 어머니는 간단히 한마디했다.
"알어서 좋도룩 허여."
나는 15일 다시 농협에 가서 내 이름으로 2만원을 더 보내고, 아내 이름으로 2만원, 어머니와 아이들 이름으로 각 1만원씩을 보냈다. 그러니까 합 10만원을 보낸 셈이다. 자동차 수리비를 계상하여 앞으로 성금을 더 보낼 생각이다.
<오마이뉴스> 기사에 따르면 16일 오후 4시 현재 친일인명사전 성금 대열에 1만 6661명이 참여하여 4억 80만 122원이 쌓였다고 한다. 참으로 감격스런 일이다. 4억 여 원 중에 우리 가족이 낸 10만원은 아주 작은 금액이지만 역사를 바로잡고 진전시키는 그 큰 물줄기에 작은 물방울들로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영광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역동의 이 아침에 다시금 우리의 참된 역사를 믿고 우리의 밝은 미래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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