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 후 복학해서 총여학생회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 전에도 여성주의에 대한 관심이 없진 않았어요. 여성주의가 주목을 끌기 시작한 때였거든요. 왠지 여성주의하면 쿨해 보이고 진보적인 것 같고. 그래서 솔깃했던 것도 있죠."
그때까지도 차우진씨에게 여성주의란 '저 쪽의 삶'이었다고 한다. A학점을 받으며 여성학 수업을 들으면서 그저 좋은 '남자친구' 혹은 '아버지'가 되어야지 하고 다짐했던 것이 고작이었다.
"총여학생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여러 가지를 고민하게 되었어요. 내가 왜 여기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이 운동의 주체인가? 같은 물음들이 반복됐죠."
대자보나 펼침막에 '우리'라고 쓸 때, 학생회 행사 준비를 도맡아 하고도 친구들로부터 "도와줘서 고마워"라는 말 밖에 듣지 못할 때 차씨는 당혹스러웠다. 자신이 여성운동을 '하는' 것인지, 여성운동을 하는 다른 여자친구들을 '도와주는' 것인지 스스로도 헷갈릴 때가 많았다. 이런 혼란스러움을 공감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차씨는 한 사이트에 글을 올리게 됐다.
"그런 느낌을 담은 제 글에 답글이 여럿 달려있어 봤더니, 모두 남자들이 썼더라구요. 자기들도 그런 걸 느낀 적이 있다는 거죠. 서로 너무 반가웠어요."
Men in Feminism
그렇게 그들은 모였다. 처음부터 '여성주의와 여성운동에 대해 고민해 보자' 따위의 거창한 목표는 없었다.
"만나서 수다떨고 술마셨어요. 그러면서 이런저런 고민도 하고. '여성운동 내에서의 소외'를 경험한 남자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공감받는 자리였던 거죠."
그런 만남이 몇 년을 두고 이어졌다. 그동안 그들은 여성운동 내에도 '남성이 이야기 해야 하는 영역들이 있다'는 것과 이를 위해 좀 더 본격적인 모임을 꾸려보자는 데 동의했다. 남성페미니스트모임 MenIF(Men in Feminism)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정식 명칭을 정하고 모임을 꾸리기로 한 것은 2001년이지만 공식적인 활동은 지난해 5월부터 시작했어요. 그동안은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발전시키는 시간이었던 셈이죠."
그 첫번째 활동이 바로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함께 '성폭력 근절을 위한 남성서포터즈 캠페인'을 벌인 것이었다. 컨퍼런스를 준비하고 남성들을 위한 성폭력 근절 가이드북 '성폭력 근절, 남성도 뛴다!'를 만들었다. 온라인 캠페인을 위한 사이트 www.StopRapeByMan.com 도 제작했다.
"남성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경험과 고민들을 이야기해 보려고 노력했어요. 군대나 남자고등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여성들은 알기 어렵잖아요."
"사랑한다고 말해보세요"
"남성이기 때문에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 남성이라는 이유로 배제되는 부분들이죠."
'남성이 이야기해야 하는 영역'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느냐고 묻자 차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남자이기 때문에 경험하는 것들도 많지만 반대로 남자이기 때문에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도 많다고. 사실 후자가 더 문제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를테면 남자들은 관계맺기에 서툴러요. 친밀감이라든가, 감정표현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배우지 못하거든요. 한마디로 단순하게 길러지는 거예요. 말이 아닌 힘이 대화 수단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여성과 남성이 일으키는 불화와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남성의 폭력은 대부분 그런 불일치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애인과 부인, 이성친구들, 심지어는 자신에게조차 어떤 태도를 보여야하는지 모르는 거예요. < Love Actually >라는 영화에 보면요, 한 나이든 가수가 크리스마스날 그의 매니저를 찾아가서 '네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어'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와요.
두 남자의 엉거주춤한 포옹에 참 공감했어요. 남자들은 그만큼 서툴러요. 물론 이후 대사였던 "포르노나 보며 오늘밤을 즐기자"는 다음 대사에는 기겁했지만.(웃음)"
여성주의는 나의 신조, 삶에 대한 태도 혹은 기준
꽤 오랜 시간 자신을 여성주의자로 규정해온 그이지만 여성주의를 정의하기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그건 마치 '의자가 뭐냐?'고 묻는 것과 같아요"라고 웃으면서도 진지한 답변을 내놓는다.
"아마 신조같은 것 아닐까요? 사람을 만날 때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기도 할 테구요. 내가 최대한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 기준으로 삼는 것이 바로 여성주의라고 생각해요."
최대한 올바른 선택을 하기위해 여성주의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그러나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그는 자신의 뜻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못할 때도 있고 종종 다른 남성들의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여성주의라는 '신조'를 버릴 마음은 없다고 단언한다.
"내 욕망에 대해 솔직한 거거든요. 내가 흡족한 선택을 하는 거예요."
여성주의자 차우진씨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많다.
"MenIF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펼칠 생각이에요. 웹사이트도 만들고, 책도 쓰구요. 한국 사회에서 남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남성들의 고민이 담긴 책을 내고 싶어요."
그는 자신과 MenIF가 한 계단을 올라서서 다음 계단을 어떻게 올라갈까 고민하는 중이라고 표현했다.
"많이 지지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아직 부족한 것이 많으니까. 흔들릴 때 조언도 해주고. MenIF에 관심이 있으신 남자분들은 언제라도 함께 해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