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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머니 돌아가시면 할머니 댁 근처 지나갈 때 제일 많이 생각날 것 같아."
"나는 할머니가 봉숭아꽃 많이 심어서, 여름마다 봉숭아 꽃물 들이라고 백반이랑 다 넣어서 다져다 주시던 것 생각 날 것 같은데."
"나는 된장찌개 끓여서 할머니 무덤에 갖다 드려야지, 나 먹으라고 매일 된장찌개 끓여 주셨으니까."
"그런데 엄마, 엄마 많이 울 거지?"
'얘들아, 외할머니 돌아가시면 엄마는 얼마나 슬플까…' 저녁을 먹으며 무심코 꺼낸 이야기에, 두 아이는 저마다 종알거리면서 서로 맞장구도 치고 웃기도 하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슬픔이라든가 근심, 두려움 같은 표정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살면서 이런 질문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는 어려서 죽음 이후를 생각하면 늘 지금 살고 있는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어차피 살다 죽을 것을 왜 태어난 것일까' 하는 고민에 번번이 빠져들곤 했던 기억이 난다.
땅딸막한 키에 백발인 에디는 바닷가에 있는 놀이공원 '루비 피어'의 정비 반장이며, 아이들에게는 그냥 '놀이공원 할아버지'이다. 전쟁에서 다친 왼쪽 무릎에 관절염이 있어 늘 지팡이를 짚고 다니고, 지난주에는 의사에게서 대상포진(帶狀疱疹, 몸에 띠 모양으로 물집이 생기며 열이 나는 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놀이 기구 정비는 아버지가 하던 일을 이어받아서 하게 된 것이고, 청년 시절 전쟁에 나갔던 때를 빼고는 '루비 피어'를 떠난 적이 없다. 이런 에디가 여든 셋 생일날 추락하는 놀이 기구 밑에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구하려다가 목숨을 잃는다.
죽어 어딘가에 도착한 에디. 책은 이 곳에서 에디가 차례로 만나는 다섯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에디의 한 평생을 다시 구성해 보여준다. 이야기 사이사이에는 에디가 그동안 살면서 맞은, 각기 다른 생일의 풍경이 바로 눈앞에서처럼 생생하게 펼쳐진다.
에디는 아버지의 무관심과 폭력과 침묵에 억눌린 채, 자신의 생이 전쟁에서 다친 다리에 꼼짝없이 묶여버렸다고 생각한다. 또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어머니를 곁에서 돌봐드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또 그를 '루비 피어'에 머물도록 붙잡았다고 느낀다.
새로운 곳으로 떠날 수도 없었고,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도 없었고, 그러면서 아버지 손톱에 낀 기름때와 똑같은 기름때가 에디의 손톱에도 늘 끼어 있게 된다. 자신의 인생이 보잘것없고 하찮다고 생각했기에, 생에 대한 열정도 희망도 즐거움도 느끼지 못한지 오래였다. 더럽고 지루한 일이었지만, 다만 맡은 일에 대한 성실함과 책임감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힘이었을 뿐이다.
에디가 죽어 만난 다섯 사람 중에는 아내 마거릿처럼 에디의 삶에 직접 연결되어 있는 사람도 있지만, 어렸을 때 에디의 공놀이가 원인이 돼 교통사고로 죽은, 질산은 중독의 파란 사내처럼 스쳐 지나간, 기억조차 없는 사람도 있다.
필리핀의 전장에서 부하인 에디를 구하기 위해 에디의 다리에 총을 쏘았던 대위. 다리를 다친 이후 에디의 인생이 어떻게 변했는데, 그 고통과 괴로움과 원망이 어떠했는데, '삶은 위축되었고 모든 게 심드렁하거나 하릴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니. 에디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만다.
한편 오래 전 남편이 자신의 이름을 따 '루비 피어'를 만들었다는 루비 부인은, 에디가 알고 있었던 아버지가 아닌 진짜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해준다. 이어서 사랑하는 아내 마거릿,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디가 지른 불로 목숨을 잃은 필리핀 전쟁터의 소녀 탈라를 만난다.
탈라를 보며 에디는 통곡하고 울부짖는다. 마음 깊이 느끼는 것을 겉으로 꺼내 말하지 않고 살아온 에디, 그는 이제 슬픔과 분노의 시간을 거쳐 비로소 고백한다. "내가 슬펐던 것은 삶에서 뭘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지. 난 아무 것도 아니었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헤매고 다녔지. 난 그곳에 있으면 안될 사람 같았어."
책은 저자의 뛰어난 통찰력에 힘입어, 강한 흡인력으로 읽는 사람을 끌어들인다. 설명되지 않는 삶과 역시 설명되지 않는 죽음을 두고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하찮은 인생이란 없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삶이란 없다고 조용조용 말하며 다가든다. 결국 죽음이 삶을 설명하게 될 것이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나로 인해 죽어간다면, '아직 미처 만나지 못한 가족'인 타인이 나로 인해 웃고 운다면, 우리들 생의 무게는 대체 어느 만큼이나 무겁단 말인가. 그러나 생명 있는 모든 것이 멀게든 가깝게든 연결되어 있고, 작든 크든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역시 우리 스스로 감당해야 할 무게임을 인정한다.
팔십 평생을 끝마치고 죽어 도착한 그 곳에서 에디는 그것을 알았다. 오늘 이 곳에서 그 사실을 엿본 우리들 남은 생의 걸음이 좀 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책이야말로, 서로 이어져있는 생의 고리와 서로 묶여있는 우리들의 삶의 울타리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증거가 아니겠는가.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로 좋은 죽음, 잘 살아낸 죽음을 우리에게 보여준 작가의 솜씨가 이 소설에서도 역시 빛을 발하고 있다. "내가 죽어 만날 다섯 사람", 봄이 와 노인대학들이 개강을 하면 가서 어르신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리라.
덧붙이는 글 | (에디의 천국 The five people you meet in heaven /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서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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