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총선을 앞두고 여성의 국회진출이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가운데 열린 ‘한나라당 당대표 초청 여성지도자 신년간담회’가 기대와 달리 별 소득 없이 끝났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지역구 10% 여성 기획 공천’ ‘비례대표직 50% 여성할당을 정당법에 명시할 것’ 등 여성계의 요구가 쏟아졌으나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는 “비례대표직 50% 여성할당을 제외하고 모두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입장을 되풀이했다. 호주제 폐지에 대해 낙관적 입장을 보인 최 대표는 “총선 후 열리는 국회에서 호주제 폐지 통과가 확실시된다”고 말했다.
“지역구 우선 공천 어렵다” 말에 신랄 비판 이어져
최병렬 대표는 “여성 우선 공천이나 경선시 여성에게 가산점을 주는 문제는 헌법에 위배된다는 말이 있고 당내 반대도 커 현실적으로 실행이 어렵다”면서 “양성평등선거구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고려했으나 보통선거 원칙에 어긋난다는 의견에 따라 추진을 중단한 상태”라고 밝혔다.
최 대표는 ‘여성을 기획 공천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당선될 가능성이 있는 여성을 지역구에 우선 공천하는 문제는 남성들의 거센 반발을 살 것이다. 심지어 ‘칼부림’까지 일어날 판이다. 그게 정당의 특수한 상황이니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이하 범개협)가 제시한 정치개혁안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최 대표는 “우리 당은 비례대표 100명을 선출하자는 범개협안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만 그 외에는 대체로 우리당의 입장이 범개협안과 같다”면서 “국회의원은 국민 투표에 의해 선출된다는 것에 의미가 있기 때문에 지역구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최 대표의 발언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이어졌는데 곽배희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소장은 “‘칼부림’ 하는 남성 후보들이 있다면 그 남성들을 모조리 낙선시켜야 한다”면서 “현재 여성과 남성의 경선은 아이와 어른의 싸움이다. 아이에게 가산점이라도 주어서 어른과 같이 뛸 수 있는 위치에 오르도록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정숙 한나라당 여성위원장은 “프랑스는 여성을 50% 공천하기 위해 헌법을 뜯어고쳤다”면서 “약자를 위한 규정에 위헌 시비를 걸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신동식 한국여성언론인연합 대표는 “유능한 여성들을 당원으로 뽑아 훈련시키고 경력을 쌓게 한 후 의정활동까지 수행할 수 있도록 당에서 적극적으로 여성 인재를 키우는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현영희 21세기 여성정치연합 부산지부장은 “부정부패가 만연한 현 선거 체계에서 여성들은 경선에 나가면 지게 돼 있다”면서 “여성들에게 상향식 공천이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정현백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는 호주제 폐지, 성매매 방지 및 처벌법과 보육업무의 여성부 이관과 관련된 정부조직개편안을 2월에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처리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대해 최 대표는 “호주제 폐지안은 총선 이후 열리는 국회에서 통과될 것이 확실하다”면서 “성매매 관련법과 보육업무의 여성부 이관은 이번 임시국회에서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이밖에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움직임에 대한 대책과 여성기업인 지원에 대한 한나라당의 정책을 묻는 질문이 나오기도 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를 비롯해 이강두 정책위의장, 이상득 사무총장, 전재희·김영선 상임운영위원 등 당 관계자를 비롯해 정현백 대표 등 여성계 인사 100여명이 참석했다.
| | 광고용 여성 찾는 남성 정치판에 강펀치 | | | ‘후궁 간택론’발언 김정숙 한나라당 여성위원장 | | | | 여성 정치진출을 위해 선거 때마다 미운 털 박힐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총대를 메던 김정숙 한나라당 여성위원장이 이번에도 정치권에 신랄한 화두를 던졌다.
비례대표 3선의원 관록의 김 의원이기에 정치권이 양성평등선거구제 등 여성들이 페어플레이 할 수 있는 제도에는 반대하면서 “마치 왕이 후궁에 반색하듯 이름 좋은 여성을 영입하면서 광고를 해 후궁처럼 써놓고는 다시 바로 버린다”는 소위 ‘후궁 간택론’을 들고나올 수 있었다.
그의 냉소적 발언 이면에는 지역구 여성할당 30%의 가장 강력한 실현 방안인 양성평등선거구제안이 무산될 위기에 처한 데다가 이에 대한 여성계의 관철 의지도, 위기 의식도 결여돼 있다는 섭섭함이 깔려 있다.
-‘후궁 간택론’이 많이 회자됐는데, 당내 분위기와 반응이 궁금하다.
“당에서는 여성 폄하 발언이라고 덜덜 떨고, 심지어 엉뚱한 발언으로 돌리려고 난리도 아니었다(웃음). 여성단체장들이 이런 발언 듣고 쳐들어온다고도 하고… 오히려 격려 전화만 빗발쳤다.”
-발언의 진의는 무엇인가.
“평소 내 소신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한 것뿐이다. 정치 세계는 남성들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고, 이런 남성들은 어디 ‘상큼한’ 여성 없느냐고 말하곤 한다. 조신하고 얌전하며 상냥하고 교양 있는 여성들을 그들은 좋아한다. 이에 대한 오랜 혐오감이다. 남자든 여자든 정치역량이 있어야 정치를 할 수 있고, 인격이 돼야 정치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이런 기준보다는 남성들의 기준으로 여성들을 뽑아놓는다. 일례로 당무회의 격인 운영위의 선출직 15명 중 50%를 여성으로 뽑자고 해놓고서는 정작 이들을 뽑는 결정권은 100% 남자들에게 있다. 이 같은 틀을 만들어놓은 나는 정작 그 안에 못 들어갔다.”
-이번 발언의 배경에는 다소 소극적인 여성계에 대한 안타까움도 깔려 있다고 보는데.
“사실 여성의 지역구 진출에 있어 일전에 내가 제안해 밀어왔던 양성평등선거구제만큼 좋은 것이 없다. 다른 당들도 마찬가지지만 한나라당은 여성문제에 인색하다. 양성평등선거구제에 대해서도 위헌 시비 운운하며 핑계를 대면서 빠져나가려고만 한다. 약자를 위한 적극적 우대조치로 여성할당은 어느 나라든 다 있건만… 이럴 때 여성계가 비례대표에만 매달리지 말고, 좀더 강한 의지와 목소리로 관철시키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했더라면… 눈물이 난다.”
-최병렬 대표가 <우먼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양성평등선거구제에 대해 꽤 호의적이어서 실현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양성평등선거구제가 채택되면 당장 지역구에 출마할 여성들이 60, 70여 명은 된다. 그런데 채택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일시에 비례대표 줄에 수십 명이 서버린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난다. 여성들조차 힘이 안 모이니까.”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의 제안대로 비례대표 의석이 늘어나고, 한나라당의 양성평등선거구제나 민주당의 여성전용선거구제가 채택되면 4·15총선은 ‘여성정치 원년’으로 기록될 텐데, 지금으로서는 전망이 그리 밝지 못하다.
“기본적으로는 비례대표보다 지역구를 통해 의원 배지를 다는 것이 더 경쟁력 있고, 정치생명력이 길어 바람직하다. 정치권에서 여성은 아직 약자니까 비례대표 25명, 박근혜·추미애 의원 등 중진들이 지역구에서 25명 정도 당선되면 17대 국회 여성의원 수는 50여명에 이를 수 있었다. 국회 안에 여성이 50명 정도 있어봐라. 부조리한 여성 관련법을 모두 고칠 수 있을 뿐 아니라, 건강한 이슈를 부각시키고 생활에 필요한 제도도 만들 수 있다.”
-공은 결국 각 정당으로 되돌아간다. 정당이 여성의 정치진출에 무심하다는 것이 더 문제 아닌가.
“당이 여성인력을 키우지 않는 이상 여성 이슈에 무관심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자기 부인에겐 관심이 없듯이. 이렇게 되면 당에서부터 여성·노인·장애인 정책 등 여성친화적 정책들은 완전히 뒷전이 되어버린다. 정치인들에게 여성의 목소리가 아직도 가슴에 와 닿지 못하다면, 여성을 남성만을 위해 존재하는 부수적 인간으로 생각한다면, 진정한 정치개혁은 요원할 것이다.” / 우먼타임스 임현선기자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