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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온 집안에 금연 포스터를 붙이고 있는 큰 아이. 미소가 얄밉다.
온 집안에 금연 포스터를 붙이고 있는 큰 아이. 미소가 얄밉다. ⓒ 유성호
아내의 푸념은 저에게 '개구리 낯짝에 물 붓기' 정도였지만 아이들까지 나서서 강도 높게 금연을 외치니 뜨끔한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은 현관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니 큰 아이가 벽에 뭔가를 붙이고 있습니다. 매일 일삼는 저지레이거니 하고 지나치는데 녀석의 행동이 왠지 엄숙해 보여 가까이 가서 들여다 봤습니다.

'금연'. 아직 채 색칠하지 않은 금연 포스터를 붙이고 있던 것입니다. 과장을 보태자면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르고 심장이 덜컥 내려 앉는 듯했습니다. 저를 놀라게 한 것은 포스터가 아니라 녀석의 굳은 표정이었습니다.

이제 막 만 다섯 살을 지난 녀석의 얼굴에 담겨 있는 비장감이란. 습관처럼 사진기를 들이대자 그때서야 비로소 함박웃음을 터트립니다. 약은 녀석입니다. 뭐 하냐고 묻기가 뭐해 아무 소리 없이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채색된 금연포스터. 검은 연기가 솔직히 겁난다.
채색된 금연포스터. 검은 연기가 솔직히 겁난다. ⓒ 유성호
"헉!" 외마디 비명이 입 밖으로 가느다랗게 새어 나왔습니다. 이번엔 한쪽 벽면에 채색된 금연 포스터가 노려보듯 붙어 있습니다. 검은 연기를 내뿜는 담배를 가로 지르는 사선(斜線). 마치 생과 사의 경계인 사선(死線)인양 느껴졌습니다.

사실 양력 1월 1일부터 담배를 끊고자 결심해 1일과 2일 반나절까지 잘 이행했습니다. 그러나 모질지 못해서 이번에도 또 실패의 단맛(?)을 봐야했습니다.

끽연가들 대부분 느끼겠지만 담배가 주는 쏠쏠한 위안이 그것을 쉽게 내치지 못하게 합니다. 물론 내부적으로 니코틴에 의한 습관성이란 문제가 있지만, 아무튼 다양한 이유가 금연 실패율을 높이고 있습니다.

아이까지 나서니 집안에 금연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끽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아파트 계단으로 나가는 일도 이제는 눈치를 보면서 하고 있습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밖으로 나가 끽연을 만끽하고 들어서자 큰 녀석이 몰아세우듯 묻습니다.

"아빠, 빵야 하고 왔지?"

참고로 저는 아이들에게 담배 피운다는 표현을 '빵야 한다'고 은유적 으로 말합니다. 아이의 물음에 솔직히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음냐 음냐 응응……"하고 말머리며 말꼬리를 모두 흐립니다. 무척 길게 느껴진 부끄럽고 난처한 상황입니다.

아이의 금연 압박에 천군만마를 얻은 아내의 공세까지, 앞으로 이 어려운 난국을 어떻게 헤치고 나가야 할지 참으로 난감합니다. 저녁 식사 후 아들 녀석을 인터뷰했습니다. 어린이 집에서 무엇을 어떻게 배우고 왔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담배냄새는 나뻐요. 어지럽고, 웩!"
[인터뷰]금연키드 유근혁

ⓒ유성호
음력 정초, 강력한 압박으로 아빠의 금연을 유도하고 있는 큰 아이 유근혁을 인터뷰 했습니다.

컴퓨터 하느라 정신이 없는 녀석 주위를 맴돌면서 이것 저것 물어 보는데, 상당히 귀찮은 듯 답을 하는 등 힘든 취재원였습니다. 가감 없이 올립니다. 어법이 어긋나도 아이임을 감안해 너그럽게 봐주시길.

- 금연 포스터는 왜 만들었습니까?
"아빠 담배 피우지 말라고요."

- 왜 담배를 피우면 안됩니까?
"담배를 피우면 몸속에 있는 숨쉬기 하는 폐들이 다 썩고 오염돼 죽어 버리니까요."

- 폐가 썩으면 어떻게 됩니까?
"폐암, 고혈암(고혈압도 암의 종류로 착각하는 듯) 같은 병에 걸려요."

- 왜 포스터를 많이 만들었습니까?
"왜냐하면 계속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요."

- 포스터를 만들면서 어린이 집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아빠한테 보여 드리고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하고 또 피우면 계속 보여 주라고 말씀하셨어요."

- 연기를 왜 검정색으로 칠했습니까?
"선생님이 <담배의 비밀>이라는 동화(교재인 듯)를 보여 주셨는 데 담배 피는 아저씨가 있었어요. 아저씨의 담배 연기에 나쁜 세균이 많이 있었는 데 그 세균이 검은 색이었어요. 그래서 검정색을 칠했어요."

- 근혁이는 크면 담배를 피울 겁니까?
"아뇨."

- 담배 연기 냄새는 어떤가요?
"나뻐요. 어지럽고 웩!(그러면서 고개를 꺾으며 죽는 척 합니다)"

- 아빠는 담배 끊으면 심심한 데 어떡하지요?
"그럼 담배에 불을 붙여서 얼굴에 대어 보세요. 불이 붙어서 신나잖아요(엽기적인 대답에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 유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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