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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땅의 10분의 1이 우리 땅인 줄 알아요."
잘 아는 분이 한숨을 쉬며 자조적으로 말한다. 대학 교수인 그 분의 큰딸은 작년에 미대에 들어갔고, 올해는 둘째 딸이 음대에 들어갔다. 중요한 건 자식을 둘씩이나 이른바 돈이 많이 든다는 예능을 시켰다는 사실이다.
제주도 출신인 그는 이따금 동료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아니, 어디 숨겨놓은 땅이라도 있어요? 지방 사립대 월급에 어떻게 둘씩이나 예능을 시키고 계세요. 대단해요."
물론 그는 숨겨놓은 땅도, 물려받은 재산도 없다. 그저 월급만으로 살아가는 보통의 소시민이다. 그러니 힘이 들긴 했을 것이다. 언젠가 그는 이런 얘기도 했다.
"빨리 망하고 싶으면 도박을 하고, 서서히 망하고 싶으면 음악을 시키라고 하던데 그게 빈 말이 아니더군요."
물론 과장된 말이기는 했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는 아닌 것 같았다. 그의 작은딸은 바이올린을 전공한다. 그런데 레슨비가 이중으로 든다고 했다. 원래 선생님에게 들어가는 '큰 레슨비'와 소위 새끼선생에게 들어가는 '작은 레슨비'. 이런 이중과세(?)는 음악에 있어선 흔한 일이라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콩쿠르에 나갈 때마다 반주자에게 들어가는 반주비와 방학 때 열리는 캠프비가 수월치 않단다. 그래서 자주는 못 보낸단다. 또 악기라도 한 번 바꿔주려면 수 천만원이 드는 실정이고. 딸이 좋아해서 시키긴 했지만 허리가 휘청거린다고 한다.
음악 전공에 대한 이러저러한 얘기를 듣다보면 솔직히 나 같은 사람은 한숨만 나온다. 물론 관련이 없다면, 또 관심이 없다면 한숨 지을 일도 없겠지만 나 역시 음악을 좋아하는 딸이 있어 그 속사정을 알아보고 다니던 때가 있어서이다.
요즘은 우리 때와는 달리 피아노 배우는 일은 아주 흔하다. 피아노는 기본이고 그 외에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를 배우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초등학교에서도 방과 후 활동으로 바이올린이나 플루트 클래스가 개설된 곳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던 나는 베토벤, 모차르트 등의 오래된 LP판을 제법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나면 종종 음악회에도 다녔는데 무대 위의 연주자들을 볼 때마다 음악과 함께 사는 그들을 몹시 부러워했다. 그래서 이 다음에 자식이 원한다면 음악을 시키는 것도 좋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
큰딸이 태어나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보통의 엄마들처럼 나 역시 아이에게 피아노를 시켰다. 물론 집 앞에 있는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였다. 그동안 이사를 많이 다녔지만 딸은 한 번도 레슨을 쉬지 않았다.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또 피아노 선생님이 상(賞)으로 이마에 붙여준 '골드 별'도 동기 유발이 되었는지 딸은 조금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열심히 그리고 묵묵하게 피아노 책을 정복해(?) 나가고 있었다.
'바이엘 상·하. 체르니 100번, 30번, 40번, 50번'
하지만 전공까지 하리라고는 애시당초 꿈도 꾸지 않았다. 그 길이 힘들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에.
그렇게 피아노를 배우던 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방과 후 활동으로 바이올린도 배우게 되었다. 레슨비는 월 3만원으로 아주 저렴했다. 바이올린 수업은 한두 명만을 꼼꼼하게 봐주는 레슨이 아니고 열 대여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한꺼번에 모아놓고 가르치는 '무늬만 레슨'이었다. 하지만 활을 켜면서 '유모레스크'를 폼나게 연주하는 모양은 그런 대로 봐줄 만했다.
물론 이때도 바이올린을 전공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안 했다. 아니 못했다. 그저 교양으로 배울 뿐이었다. 남들이 하는 학습지, 영어학원, 과외 대신에 음악을 한 셈이었다.
그렇게 음악 공부를 하던 아이에게 고민이 생겼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학원의 피아노 선생님으로부터 아이가 절대 음감도 있고, 소질도 있어 보이니 전공을 시키면 좋겠다는 얘길 들었다.
또 6학년이 되어서는 현악부의 악장을 맡은 딸이 학교 축제 때 비발디의 '봄(사계)' 가운데 '곡 중 솔로'를 연주하게 되면서 선생님으로부터 전공 제의를 받았다.
행복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았다.
"아이에게 설사 소질이 있다 하더라도 그 어려운 과정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월급쟁이 수입에 끝까지 뒷바라지를 해줄 수 있을까. 내 일 제쳐두고 아이에게만 매달릴 수 있을까."
극성이라고 표현할 만큼 자식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리하는 연주자 엄마들의 얘기는 익히 들어왔던 터라 우선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의 진로에 대해 먼저 전문가로부터 진단(?)을 받아보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안면이 있는 대학교수에게 내 고민을 얘기하고 한 번 봐달라고 했다.
"예원에 갈 정도는 아니에요.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냥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지도를 받은 걸로는 봐줄 만 하지만 전문 연주자로 나서기 위한 '푸른 싹'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처음에 좋은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거라고 했다. 다소 실망스럽긴 했지만 음악과 교수의 냉정한 평가는 다른 한편으로 내게 큰 위로가 되기도 했다.
"얘, 넌 전공 대신 취미로 피아노를 치면 되겠어. 중학교 들어가면 음악 실기 시험도 있다니까 그 때 솜씨를 발휘하고."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문제에 대해선 아이가 크게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이젠 음악가로서의 길은 정리가 되는 듯했다. 그런데 6학년 여름 방학이 시작되던 날, 아이는 진지하게 내게 말했다.
"엄마, 나는 이 다음에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전공도 그 쪽을 선택하고 싶고."
자주는 아니지만 우리 가족은 그런 대로 공연장을 찾는 편이다. 내가 음악을 좋아해서 가족들을 끌고(?) 다니는데 그동안 '리골레토', '베를린 필', 'KBS 오케스트라', '지하철 1호선', '명성황후', '오페라의 유령' 등의 공연을 관람했다. 언제나 제일 싼 티켓을 구입하여.
공연을 관람할 때마다 예술이 주는 감동에 매료당했던 나는 앞으로는 문화의 영향력, 위력이 커질 거라는 생각을 줄곧 해왔다. 그러던 차에 마침 딸이 '음악 관련 일'을 하고 싶다고 하니 기대도 되고 궁금해지기도 했다.
"뭘 하고 싶은데?"
"작곡!"
딸은 학교에서 만든 '학급 문집'에도 장래 희망을 '베를린 필 전속 작곡가'로 적을 만큼 구체적으로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래, 작곡은 머리로 하는 거니까 돈은 많이 안 들 거야. 머리 좋고 창의력만 뛰어나다면 좋은 곡도 많이 쓸 수 있을 거고. 재독 작곡가 진은숙씨를 봐도 그렇잖아. 작곡은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피아노, 바이올린 쪽보다 더 자유롭고 능동적이어서 진출할 분야도 많을 거야. 순수음악, 영화, 뮤지컬, 오페라, 드라마 등등."
그런데 알고 보니 작곡이 돈이 많이 안 들 거라는 생각은 순진했다. 작곡 레슨 따로, 기본인 피아노 레슨 따로. 콩쿠르에 나갈 때에도 자기의 곡을 연주해 줄 연주자 섭외와 그 사례비….
아,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작곡을 공부하고 싶다고 하니 이번엔 좀 신경을 써 보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작곡 공부는 우선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했다. 좋은 선생님이란,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대체로 레슨비가 비싸다. 또 잘 알려진 분이다. 그러니 가계에 부담이 되긴 했지만 어렸을 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다소의 출혈은 감수해야 했다.
시창, 청음, 화성악을 공부하면서 딸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고 흥분을 했다. 그러나 반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자기 생각대로, 자기 느낌대로 쓴 곡이 선생님으로부터 자꾸 지적을 당하게 되자 작곡의 규칙들이 지겨워지는 모양이었다.
"엄마, 좋은 곡 쓴 가수들이 모두 작곡을 전공한 건 아니잖아. 나는 자유로운 게 좋은데…. 좀 지루해. 엄마가 좋아하는 김민기씨도 작곡 전공 안 했잖아."
미련 없이 그만 두게 했다. 일단 본인이 지루하다고 했으니까. 경제적인 문제가 슬슬 걱정되던 나로선 어찌보면 딸의 포기 선언이 다행스럽기도 했다.
내가 뭘 몰라서 지레 겁을 먹는 건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에서 음악을 전공한다고 하는 것은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닌 듯하다.
이제 딸은 중3이 된다. 지금은 그냥 '공부'를 하고 있다. 수학이 재밌어서 수학과를 가겠다고도 하고, 공대에 가고 싶다고도 한다. 딸이 음악가의 길을 포기한 것이 좀 섭섭하긴 하다. 하지만 제 부모의 능력을 알아 효녀 노릇을 해준 것 같아 시원하기는 하다.
지난 몇 년 동안, 딸은 자신의 진로를 두고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쳤다. 물질적인 희생이 좀 따르긴 했다. 하지만 그 시간과 공(功)은 결코 헛되지 않았을 거라고 믿는다.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봉사할 부분이 더욱 많아졌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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