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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3일자 가판에 실린 신경무 만평. 조선일보는 연일 김 추기경 관련 오마이뉴스 칼럼을 비판하고 있다.
<조선> 3일자 가판에 실린 신경무 만평. 조선일보는 연일 김 추기경 관련 오마이뉴스 칼럼을 비판하고 있다. ⓒ 조선일보 PDF
여론시장을 독과점 한 세 신문사가 다시 '합창'을 했다. 2004년 2월 2일자 신문 2면에 돋보이게 편집한 것도 같다. 상대를 겨누는 서슬이 시퍼렇다. 과녁은 <오마이뉴스>에 실린 칼럼 '추기경의 근심, 백성의 걱정'이다.

무릇 비평이란 반갑게 마련이다. 가령 소설을 냈을 때 비평이 따르는 게 소설가에게 행복이듯이, 칼럼도 마찬가지다. 기자가 쓴 칼럼에 쓴소리는 달게 들어 마땅하다. 하지만 그 비평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을 때는 전혀 다가오지 않는다.

'비평'이란 반갑지만 사실에 근거하지 않을 땐 문제

새삼 말할 나위 없지만, 사실을 바탕으로 한 비평은 우리 사회에 빈곤한 토론의 활성화를 위해 바람직하다. 정반대로 사실을 왜곡해 내놓은 비난과 마주할 때는 무시하는 게 옳다.

하지만 그 사실 왜곡의 주체가 그것을 퍼뜨린다면, 그리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쟁점이라면, 문제는 사뭇 달라진다. 사실과 다른 그 규정이 '사실'로 둔갑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어 보자.

"오마이뉴스, 김수환 추기경 비판/ 민족의 내일에 심각한 걸림돌"

<조선일보> 2면에 가장 크게 편집된 시커먼 활자다. 조선일보의 신문제목만 보면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자의 칼럼이 김수환 추기경을 '민족의 내일'에 '걸림돌'로 규정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중앙일보>도 마찬가지다. 2면에 큼직한 표제로 오마이뉴스가 김 추기경을 '민족의 걸림돌'이라고 비난했다고 편집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이는 사실 왜곡이다. 기자는 문제가 된 칼럼은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 써온 어느 글에서도 김 추기경이 민족의 걸림돌이라고 쓴 바가 없다.

김 추기경이 민족의 걸림돌이라고 쓴 바가 없어

2월 2일자 <조선일보> 2면 기사
2월 2일자 <조선일보> 2면 기사 ⓒ 조선일보 PDF
다만 어쩔 수 없이 김 추기경과 추기경을 이용하는 신문들을 더불어 비판하는 글을 쓰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을 뿐이다.

"추기경의 정치적 발언이 현실을 호도할 뿐만 아니라 민족의 내일에 심각한 걸림돌로 불거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김수환 추기경이 한 말 가운데 '정치적 발언'으로 한정했고, 그것이 현실을 호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 결과 여론을 오도할 수 있기 때문에 "민족의 내일에 심각한 걸림돌로 불거졌"다고 보았다.

국어의 상식만 지닌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는 김 추기경의 인격이 그렇다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이다. 기자는 김 추기경의 '정치적 발언'과 그 발언을 수구신문들이 십분 이용하면서 시민사회를 '친북'으로 몰아가는 현상은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보라. 조선일보의 논리비약과 감정적 선동으로 김 추기경마저 우리나라가 미국을 주적으로 여긴다고 잘못 판단했다. 그리고 추기경의 그 발언을 다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대서특필하며 여론을 몰아갔다. 그것을 비판하자 다시 두 신문은 추기경 개인을 민족의 걸림돌이라고 했다며 사실을 왜곡한다.

기자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편집국이 '김 추기경의 정치적 발언이 민족걸림돌로 불거졌다'는 명제와 '김 추기경이 민족걸림돌'이라는 명제를 구분조차 못할 정도로 기자 상식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조선-중앙, '목적' 위해선 사실까지 서슴지않고 왜곡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 ⓒ 연합뉴스
그렇다면 무엇인가. 단 하나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노상 해왔듯이 '목적'을 위해서는 사실까지 왜곡하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고 볼 수밖에 없다.

더구나 두 신문은 은근히 가톨릭 전체와 오마이뉴스 또는 기자 사이에 싸움을 부추기고 있다. 그 싸움에서 수구세력은 잃을 게 없을 터이다.

조선일보·중앙일보 사주와 고위간부들에 대한 기자의 줄기찬 비판에 침묵하던 저 골리앗들이 추기경 뒤에 숨은 채 엉뚱한 감정적 선동으로 가톨릭과 인터넷매체를 추썩거리는 모습은 남우세스럽다.

거듭 강조하지만, 미국이 이 땅에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분명히 엄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그 확률이 현실로 되는 비극을 막으려면 온 국민이 현실을 정확히 인식해야 하는 상황에서, 거꾸로 그 사실을 호도하는 세력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작게는 기자가 지닌 언론인의 윤리와 어긋나고 크게는 민족적 죄악이다.

민족이 처한 현실을 호도하는 사람이 누구든 잘잘못을 가려 논평하는 일, 그것이 분단시대에 기자로 밥을 먹고사는 사람의 의무이다. 나름대로 언론운동을 지며리 해 온 중견언론인으로서 기자는 한국언론에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언젠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젊은 언론인들이 그 길에 동참하리라는 기대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 희망이 있는 한 추기경 뒤에 오늘 숨어있는 골리앗과의 싸움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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