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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8일 변형윤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사장으로부터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는 임동원 전 국정원장.
1월28일 변형윤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사장으로부터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는 임동원 전 국정원장. ⓒ 한겨레신문 제공
오늘(2월3일) 조간 신문에 난 두 사람 기사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하나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 실린 전 경제부총리 '이헌재 모시기 삼고초려(三顧草廬)' 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한겨레>에 실린 '임동원 전 국정원장 대담' 기사이다.

'DJ 사람' 이헌재-임동원의 세 가지 공통점

이 두 사람을 굳이 분류하자면 김대중(DJ) 전 대통령 사람이다. 두 사람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임중 발탁해서 크게 쓴 대표적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헌재씨는 '국민의 정부' 초기 금감위원장에 이어 재경부장관 겸 부총리를 지냈으며, 임동원씨는 외교안보수석을 거쳐 통일부장관을 두 번이나 지냈으며 국정원장과 대통령외교안보통일 특보까지 지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각각 오랜 기간 전문관료와 외교안보 전문가로 과거 정부에서 활동한 후 재야에 묻혀 있다가 DJ에 의해 재기용됨으로써 뒤늦게 출중한 경륜을 펼치면서 만개(滿開)한 '늦깎이'라는 점이다.

재무부 부이사관을 끝으로 20년 가까이 '낭인' 생활을 거친 이 장관은 IMF 외환위기 와중에 금감위원장으로 화려하게 컴백해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국제 스타'로까지 발돋움했다.

임 장관 또한 노태우 정부 때까지 통일부차관으로 남북고위급회담에 참여해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에 크게 기여했으나 김영삼 정부 들어서 재야에 묻혀 있다가 김대중 정부 전 기간 동안 대북정책과 외교안보통일 전략을 총괄 기획·집행하고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등 DJ를 만나 '만개'한 케이스.

두 사람의 두 번째 공통점은 '국민의 정부'에서 중책을 맡았던 두 사람의 자식들이 공교롭게도 '참여정부'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헌재 전 부총리의 장녀인 이지현 전 SBS 기자는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부대변임 겸 외신담당 대변인을 거쳐 현재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대변인으로 활동중이다.

또 임동원 전 국정원장의 장남인 임원혁 박사는 청와대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 제도개선팀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지난해 정부의 이라크 추가파병 결정에 반발해 사의를 표명하고 한국개발연구원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굳이 마지막 공통점을 하나 더 찾는다면 두 사람 다 키가 작다는 점이다. 그러나 DJ가 뒤늦게 '거인'으로 평가받듯이, 이들 또한 공직에서 물러난 후 나라 안팎에서 '작은 거인'으로 새롭게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새정부에서의 공직 복귀설이 끊이지 않는다.

'금융개혁 전도사' 이헌재와 '햇볕정책 전도사' 임동원을 잡아라

노무현 정부는 이헌재 전 장관을 4·15 총선 출마가 확실한 문희상 청와대비서실장 후임 1순위 인사로 꼽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헌재 전 장관과 2월2일 오찬을 함께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미 그에 앞서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과 청와대 관계자 등이 이씨에게 세 차례에 걸쳐 비서실장을 제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는 '아직' 부인하고 있지만 그의 중용은 이미 '초읽기'에 들어간 느낌이다.

현 정부의 임동원 전 장관에 대한 구애도 그에 못지 않다. 익히 알려졌듯이 청와대는 임동원 전 장관을 포함한 대북송금 관련자에 대한 특별사면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청와대는 그에 대한 사면에 이어 노 대통령의 총선 '올 인'(all in) 전략에 따라 부산지역에 투입되는 신상우 민주평통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의 후임으로 기용하는 것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이 의장을 맡고 있는 평화통일정책 자문기구인 민주평통의 수석부의장에 임씨를 앉히는 것은 상징성이 크다.

열린우리당은 한 발 더 나아가 '햇볕정책'의 상징적 인물인 임동원 전 장관을 영입하는 방안을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별사면에 이어 임 전 장관을 영입하면 DJ와 햇볕정책 지지층을 확실하게 끌어들일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헌재 전 장관이 이처럼 1순위로 꼽힌 이유는 경제에 대한 식견은 물론 김대중 정부 초기 기업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는 등 개혁적 마인드가 탁월하다는 점 때문이다.

알다시피 이헌재 전 장관은 김대중 정부 초대 금융감독위원장에 이어 재경부장관을 역임하면서 '금융개혁 전도사' 혹은 '기업 구조조정 전도사'로 이름을 날렸다. 어눌한 말투지만 정곡을 찌르는 언변과 거침없는 일 처리로 정평이 나 있는 이 전 부총리는 IMF를 계기로 금융감독위원장으로 컴백해 '대우' 해체를 요리했고 이어 재경부장관으로 승진해 국가 경제를 주물렀다.

이헌재 재정경제부장관이 지난 2000년 7월 과천청사에서 기업구조개혁 방안과 관련 경제장관 간담회를 주재하고 있다.
이헌재 재정경제부장관이 지난 2000년 7월 과천청사에서 기업구조개혁 방안과 관련 경제장관 간담회를 주재하고 있다. ⓒ 연합뉴스
루빈 전 미 재무 "DJ와 그의 참모들은 한국경제를 회생시킨 영웅"

그는 구조조정의 후유증으로 중도 하차하긴 했지만 관가에선 아직도 '이헌재 신도'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한국의 금융구조개혁을 주도한 공로로 '아시아 스타 50인'에 선정된 데 이어 2001년 4월엔 미국 '우드로 윌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을 기린 이 상은 미국의 공공연구재단인 '우드로 윌슨 인터내셔널센터'가 매년 각계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민간 및 공공부문 인사들을 대상으로 수여해 왔는데 그동안 제임스 베이커,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 폴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등이 이 상을 받았다. 외국인으로는 이 전 장관이 처음이었다. 윌슨센터는 국제전략연구센터(CSIS)와 함께 지난해 5월 미국을 처음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 초청 만찬을 공동주최하기도 했다.

이 전 장관은 또 외환위기 과정에서 금융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주도한 공로로 지난해 5월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제정한 '닛케이 아시아상'을 수상했다. 또 1월14일에는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고이즈미 총리 관저에서 '일본 경제의 회생과 도전'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어전회의' 토론회에 초청되어 한국의 구조조정 노하우를 일본에 '전수'하고 돌아왔다.

해외에서 더 주목받는 자신의 '후광'을 모를 리 없는 이헌재 전 부총리는 지난 1월6일 김대중 정부에서 차관급 이상을 지낸 공직자들이 10만원씩 돈을 추렴해 자리를 마련한 DJ '팔순잔치'에 참석해 "김대중 대통령 밑에서 경제개혁에 참여한 덕분에 세계 각국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상을 받기도 했다"면서 "이는 김 대통령께 돌아가야 할 것을 대신 받은 것"이라고 공(功)을 DJ에게 돌렸다.

그는 또 "영국도 IMF를 극복하는 데 6년이 걸렸다. 김 대통령께서는 이 나라를 구하셨다"고 IMF 극복과정을 회고하면서 "김 대통령이 지금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평가를 받지만, 시간이 지나면 국내에서도 업적에 대해 새롭게 평가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김정일 위원장과 먼저 대화

사실 DJ의 '진가'는 해외에서 더 평가받는 것이 사실이다. 로버트 루빈 전 미국 재무장관은 지난해 11월에 펴낸 회고록 <불확실한 세계:월가와 워싱턴에서의 어려웠던 선택들>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제화와 시장의 신뢰를 회복시킬 수 있는 정책을 수용한 것이 한국의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밝히고 "김 전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경제를 회생시킨 영웅"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클린턴 행정부의 또 다른 핵심 각료였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또한 지난 2000년 10월 북한을 방문하고 귀국하는 길에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비전이 있고 그것을 조직적 방법으로 추진하는 뛰어난 인물(a remarkable human being)로 자신의 업적 위에 우리가 (대북 관계를) 쌓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이런 말을 실제로 할 기회는 매우 드물지만"이라는 단서를 단 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야 김정일 위원장과 논의할 수 있었다"며 김 대통령을 '거인'에 비유하는 극진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전세계를 상대로 전방위외교를 펼친 여장부 올브라이트의 비유가 적절하다면, 1월28일 제6회 '한겨레통일문화상'을 수상한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이야말로 김대중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그보다 앞서 김정일 위원장과 먼저 대화한 '작은 거인'이다.

73년 4월19일, 자주국방과 '율곡계획'의 서막을 올린 기념비적인 날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자주'(自主)라는 용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난무하는 요즈음이다. '자주국방'이니 '자주외교'니 용어들이 마치 '동맹외교'와 대척(對蹠)되는 용어인 것처럼 오용되기도 한다. 또 사람들은 4·19 하면 1960년 4월19일의 그 '미완의 혁명'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4월19일을 단군 이래 최초로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군사전략을 수립하는 단초가 된 기념비적인 날로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한국군 최초의 전력증강사업인 '율곡계획'의 서막을 올리는 최초의 군사전략 보고서인 <지휘체계와 군사전략> 자체가 1급 군사기밀이었기 때문에 일반에 알려질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1973년 4월19일 당시 이병형(작고) 합참 본부장은 군지휘연습 기간에 합참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지휘체계와 군사전략>이라는 제목의 보고서(1급 군사기밀)를 가지고 보고를 하게 된다. 이 보고서는 그 한달 전에 '자주국방을 위한 한국군의 독자적인 군사전략을 마련하라'는 이병형 본부장의 지시를 받은 임동원 합참 전략기획과장(당시 대령)이 한 달만에 만든 보고서였다.

이날 이병형 장군이 박 대통령한테 보고한 <지휘체계와 군사전략>의 핵심은 자주국방을 위해서는 미국이 만든 장비와 작전계획 그리고 군사전략에 의해 움직이는 군대가 아닌 자주적 군사전략이 필요하다는 것과 지금부터 합참이 중심이 되어 자주적 군사전략을 세우고 그에 입각해 자주적 군사력을 건설하겠으니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께서 승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보고를 들은 박 대통령은 "진작부터 우리 군에서 이런 보고가 나오길 기대했다"면서 이병형 장군에게 유엔사령부 해체에 대비해 합참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기본군사전략을 세우고 장기 군사력 건설계획을 마련하라는 지침을 하달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자주국방'을 추진할 율곡사업의 발동이 걸린 것이다. 그런 점에서 30여년 전 4·19는 자주국방과 율곡사업의 서막을 올린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필요가 있다.

"남북기본합의서를 구성하는 문장 자체가 임동원의 작품"

임동원 당시 전략기획과장은 그때의 상황을 지난해 11월경에 필자에게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

"<지휘체계와 군사전략>을 보고받은 박 대통령의 '승인'을 계기로 저와 이병형 장군은 하루 두 시간씩 두 달 동안 토론하며 단군 이래 최초의 독자적인 군사전략을 세우게 됩니다. 물론 합참의 다른 장교들에게는 일절 비밀에 부쳤습니다. 저와 이병형 장군은 기본군사전략에 30년 계획으로 전략적 정세전망을 하고서 자주적인 전략개념의 목표와 유형, 군구조 발전방향, 군사력 건설의 개념 등을 포괄하면서 10년씩 3단계 발전방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니 올해로 꼭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바로 이 73년 4월19일 보고를 계기로 유엔사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해 합참이 3군을 통합해 작전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기구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전략기획국'과 '전략정보국' 등 '전략'이라는 이름을 단 부서가 창군 이후 우리 군에 처음 생겨났다. 그런 그에게 '전략가'라는 용어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7년여만에 육군 소장을 끝으로 군복을 벗은 임씨는 호주 대사, 외교안보연구원장을 거쳐 90년부터 시작된 남북고위급 회담 대표로 활동하면서 92년 통일부차관 시절에 역사적인 '남북기본합의서'를 북측과 함께 채택하는 데 합의하게 된다.

남과 북이 남북관계의 '권리장전'이라고 부르는 이 기본합의서에 합의하게 된 데는 80년대말 구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체제변환과 탈냉전의 안보환경 변화와 그것을 남북관계 개선의 기회로 삼은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등으로 남북한 당국이 자주적으로 공개적인 협의를 통해 이뤄진 측면이 크지만 당시 '비둘기파'인 임동원 차관이 안기부가 주도한 '매파'에 맞서 남북협상을 주도한 측면도 크다.

실제로 90∼93년초까지 열렸던 남북고위급 회담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한 사람은 임동원 차관 혼자뿐이었다. 임동원씨가 통일부장관 시절에 차관을 지낸 정세현 현 통일부장관은 "남북기본합의서를 구성하는 문장 자체가 그분의 작품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그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92년 2월 이른바 '문민정부'가 출범할 때 임동원 차관이 있는 통일부의 장관으로 부임했던 한완상 한성대 총장은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주변부에 있었다는 점이다"면서 "11년 전에 임동원 차관과 함께 일을 하고 싶었으나 (권력의) 중심부 사람들이 허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평화와 통일을 향한 탈냉전의 프로세스'의 한 복판에 서 있던 임동원

그러다가 93년 3월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통일원차관에서 물러난 임동원씨의 '대북전략'은 95년 DJ와 만나 빛을 보게 된다. DJ는 능력과 건강을 이유로 들어 고사하는 그를 '삼고초려' 끝에 설득하였으며, 그는 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 시절에 DJ와 수 차례 독회와 토론을 거쳐 나중에 김대중 정부 대북정책의 '바이블'이 된 '김대중 3단계 통일론'을 완성하게 된다.

그리고 DJ 집권과 더불어 외교안보수석·통일부장관·국정원장 등 사실상 외교안보통일 분야의 최고 정책결정권자로서 그가 입안·집행한 대북 포용정책은 남북 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 그리고 북한의 7·1 경제관리개선조처 같은 경제개혁 등으로 결실을 보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대북송금 특검으로 70 평생 처음 검찰 조사를 받고 법정에 서게 되어 유죄를 선고받은 그는 사면 논란에 대한 소회를 묻자 "국가이익을 실현하는 방법에는 외교나 전쟁 아닌 제3의 방법, 즉 이른바 '비밀공작'이 있다"면서 "국정원이 국익을 위해 공작의 일환으로 현대의 대북송금 편의를 제공한 것에 대해 사법적 잣대를 들이미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는 말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또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이 과연 DJ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참여정부가 처음엔 표면상으론 계승발전시킨다고 말하면서도 내막적으론 이전 정부와의 차별화에 더 신경을 썼던 것 같다"면서 "그런데 최근 와서는 다시 분명하게 공개적으로 6·15공동선언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다소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임동원 전 장관은 88년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에서 시작된 남북화해협력의 최일선에 서 있었다. 그는 1월28일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 기념강연에서 80년대말 탈냉전 이후 90년대 초 남북협상에 참여해 지금에 이른 이 시기를 '평화와 통일을 향한 탈냉전의 프로세스'로 불렀다.

그의 경험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할 교훈

지난 15년여 동안 한반도 탈냉전 프로세스의 한 가운데 있었던 그는 "분단과 냉전은 외세에 의해 강요된 것이지만 냉전 종식과 평화외 통일은 국제적 지지와 협력을 얻어 우리가 자주적으로 주도해 나가야 한다"고 수상 기념연설을 끝맺었다.

한겨레통일문화상 심사위원회(위원장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는 남북관계를 화합과 상생의 관계로 바꿔놓는 데 큰 역할을 한 그를 선정한 배경을 밝히면서 "대북송금 특검으로 그가 겪는 수난과 고초를 특별히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 또한 수상소감에서 "오늘의 이 영광은 일평생 굳은 의지와 신념으로 남북 화해협력을 추구해온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 분을 모시고 통일성업에 몰두해온 모든 분들과 함께 나누려고 한다"고 말해 공(功)을 DJ에게 돌렸다.

임동원 국정원장은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6·15 공동선언문을 서명할 때 배석한 유일한 남측 인사였다. 그는 정상회담 마지막날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을 설득해 북한 인민군을 대표하는 조명록 차수로 하여금 사복을 입고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머리를 숙이게 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15년 동안 '평화와 통일을 향한 탈냉전의 프로세스'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그의 경험은 비단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할 교훈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정부가 비록 DJ의 정치적 계승자인 '리틀 DJ'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는 내칠망정, 경제개혁(구조조정 및 외환위기 극복)과 외교안보(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 분야에 큰 족적을 남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이 '작은 거인'들의 진가에 주목하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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