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있어서 '북한'의 존재는 여전히 껄끄럽다. 치열한 대립의 구도에서 햇볕정책으로 정책의 기조는 바뀌어도, 한국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북한'은 여전히 금기의 대상이다.
한 나라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을 받아온 김수환 추기경의 '반미·친북'세력 발언으로, 입장을 달리하는 언론인들 사이에서 설전이 벌어지고, 4·15 총선을 앞두고 이미 퇴색되었어야 할 색깔논쟁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학자의 양심에 따른 행동도 '북한'과 관련돼 있는 경우 '친북'이라는 이름으로 규정되어 감옥을 가고 있는 현실이다.
여전히 냉전의 물줄기가 북한을 바라보는 거대한 시선 가운데 하나인 현실에서, 매우 의미있는 책 한 권이 출판되었다. 바로 통일정책연구소에서 묶은 <주체사상과 인간중심철학>(예문서원)이라는 책이다.
1997년 북한과의 관계에서 가장 큰 사건은 북한 노동당 당비서를 역임하고 '주체사상'이라는 북한의 통치이데올로기를 정초한 황장엽의 망명이었다. 정치적 망명을 실행했던 북한의 정치가들 가운데 최고위급에 속하는 그는 망명지로 제3국을 택한 것이 아니라, 이해의 직접적 당사국인 남한을 선택했다.
그의 망명은 크게 '정치가의 망명'이었지만, 학술계 쪽에서 보면 그의 망명은 주체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정초한 '사상가의 망명'이었다. 정치인인 동시에 사상가였던 황장엽의 망명으로 인해 남한은 비로소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주체사상'이 아니라 철학과 사상으로서의 '주체사상'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만남의 결과가 처음으로 결집된 것이다. 황장엽의 남행 이후 통일정책연구소를 중심으로 젊은 연구자들이 장기간 황장엽과의 학술적 토론을 진행하였다. 단순한 학술세미나와 같은 일회성 만남이 아니라, 정기적인 세미나를 통해서 주체사상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의미와 그 중심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그들이 이해한 주체사상은 인본주의에 근거한 인간중심철학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황장엽씨가 1972년 일본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라고 한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말은 주제사상이 계급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고안된 인간중심의 철학임을 입증하고 있다.
특히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탄생한 실천지향적인 인본주의 철학이 바로 주체사상이라 밝히고 있다. 황장엽은 사회주의의 몰락과 자유민주주의가 봉착하고 있는 문제점과 한계점들을 바라보면서 이것을 총체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 철저하게 실천을 지향하는 인간중심의 철학, 즉 주체사상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철학이 북한의 통치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아 가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 '정치적 색'들이 가미되었으며, 나중에는 철저한 변절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황장엽은 북한의 주체사상에 대해서 '본래적인 인간중심 철학의 구상에 대한 정치적 왜곡의 산물'로 평가한다. 그리고 그것과의 차별성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인간중심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주체사상의 탄생과 그 사용이 어떠했던, 결국 이 사상은 20세기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탄생한 철학이다. '한국철학'을 철저하게 '수입의 철학'으로 규정하는 입장에서 보아도, 이것만큼은 그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한국철학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주체사상'은 20세기 한국철학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중심 화두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엮은 연구자들은 바로 이러한 점을 염두해 둔 상태에서 주체사상이 가진 정치성을 걷어내고, 순수하게 그것이 가진 이론과 그 논리에 따라서 주체사상을 정리하고 있다. 여전히 냉전의 따가운 시선이 주류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과연 이러한 정리들이 어떠한 반향을 낳을 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북한을 하나의 동포로 인정할 때,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철학의 근본정신이 무엇인지를 돌이켜 보는 것은 통일을 대비한 중요한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지난 시기에 나는 국가 지도자의 유일 사상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에서 오랫동안 사상이론 사업을 담당하다 보니, 본의 아닌 많은 잘못을 범하였다. 이에 대해서 우리 국민과 해외동포들, 그리고 외국의 벗들에게 충심으로 사과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이 말은 이 책의 표지에 쓰여진 황장엽의 지난 일들에 대한 솔직한 술회이다.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진 학술서이기 때문에 딱딱함을 벗을 수는 없겠지만, 이 말 한마디에서 우리가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통일정책연구소 엮음, <주체사상과 인간중심철학>, 예문서원
신국판 양장 / 384쪽 / 값 2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