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커먼 교복, 빳빳하게 풀먹인 옷깃, 라디오에 보내는 엽서, 경춘선, 교련복, 이소룡, 통기타, 청바지, 버스차장…. 개봉 10일만에 전국 관객 200만명을 돌파한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에는 지난 시대의 추억과 향수가 진하게 묻어 있다.
채팅으로 만나 대화하다 ‘번개’하고 스스럼없이 서로에게 ‘작업’을 거는 세태 속에서 이 영화는 짐짓 촌스러운 사랑법을 보여준다. 남녀가 만나 손을 잡게 되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감내하던 지난 시대의 느린 사랑법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무한속도의 전쟁으로 내몰고 있는 디지털시대에서 굳이 왜 아날로그문화를 건드리는가. 아옹다옹 티격태격, 현대인은 눈에 불을 켜고 치달리며 좀더 빠르게 무엇이든 선점하기 위해 발버둥치던 현대인들은 문득 지난 시대의 ‘느림’을 추억하며 ‘심호흡’을 하고 싶은 게 아닐까. 대중문화는 현대인들의 ‘쉼’에 대한 욕구를 어김없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말죽거리 잔혹사’뿐만이 아니다. 최근 흥행과 함께 작품성도 인정받은 소위 ‘웰-메이드’ 영화들은 지난 시대를 돌아보고 있다. ‘살인의 추억’이 그랬고, ‘실미도’가 그랬다. 개봉예정인 영화들도 지난 시대를 곱씹는다. 일본에서 성공한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실화를 담은 ‘역도산’, 권력 앞에서 납작하게 엎드려 살아야 했던 지난 시대 서민들의 모습을 담은 ‘효자동 이발사’ 등의 영화는 앨범을 들춰보듯 지난 시절을 돌아본다.
어디 영화뿐이랴. ‘뽕끼’가 절절 흐르며 ‘꺾임’ 가득한 가수 이수영의 노래가 세대를 초월해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고, 1970년대 최고의 팝그룹 아바의 음악이 가득한 뮤지컬 ‘맘마미아’가 중·장년층 관객의 감성을 적시고 있다.
지난 시절의 추억과 향수를 자극해 그 당시의 세대를 공략하는 ‘복고상품’은 어느 때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기존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 시절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도 ‘복고상품’을 공유하고 있는 것. 경제난, 취업난이 계속되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 세대들이 권력체계에 저항했던 지난 시절의 청년문화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다는 문화평론가들의 분석에 많은 현대인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아날로그 문화는 젊은 세대의 생활 속으로도 배어들고 있다. ‘쫀득이’ ‘뽑기’ 등의 불량식품이 이색상품으로 인기를 끌고, ‘부루마블’ ‘억만장자’ 등의 보드게임이 온라인 PC게임 못지 않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외면적인 가치가 충만한 세상을 등지고 내면적인 가치를 찾기 위한 인도여행이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행이다.
어찌 앞만 보고 달릴 수 있을까. 주위를 둘러보고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늦으면 또 어떤가. 늦게라도 가야 할 지점에 도착하면 그만 아닌가. 디지털시대의 현란한 거죽 이면에서 이끼처럼 존재하는 아날로그문화가 ‘쉼’과 ‘느림’에 대한 현대인들의 욕구를 자양분 삼아 쑥쑥 자라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