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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돔에서 바라본 하늘 원폭 돔은 1945년 피폭 당시까지 히로시마 물산장려관으로 사용됐던 건물의 돔이었다. 피폭 당시 인근 폭심지에서 수킬로미터 내의 건물은 거의 전소되고, 철골 구조로 돼 있던 원폭 돔만이 앙상하게 남아있었다. 원폭 돔은 철거와 보존 논란을 겪다 보존이 결정됐고, 지난 1996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원폭 돔에서 바라본 하늘 원폭 돔은 1945년 피폭 당시까지 히로시마 물산장려관으로 사용됐던 건물의 돔이었다. 피폭 당시 인근 폭심지에서 수킬로미터 내의 건물은 거의 전소되고, 철골 구조로 돼 있던 원폭 돔만이 앙상하게 남아있었다. 원폭 돔은 철거와 보존 논란을 겪다 보존이 결정됐고, 지난 1996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히로시마평화공원 내 평화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피폭 후 히로시마의 모습을 담은 사진.
히로시마평화공원 내 평화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피폭 후 히로시마의 모습을 담은 사진. ⓒ 오마이뉴스 이승욱
"폭탄 투하!"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15분, 미공군 B-29 폭격기 에놀라게이(Enola Gay)호가 일본 히로시마에 그림자를 드리우자 한 발의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히로시마가 '폐허'의 도시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인류 최초의 핵폭탄. 4.5톤 무게를 지닌 '꼬마'(Little Boy)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원폭의 섬광은 3만도가 넘는 고열을 발산했고, 폭심지 반경 1.6Km내에 있던 사람들은 형체도 없이 현장에서 사라졌다. 핵폭풍으로 날아온 파편은 반경 5Km 내에 있던 이들의 몸을 관통했다.

히로시마, '폐허'의 도시에서 '평화'의 도시로

당시 인구 34만명이었던 히로시마는 원폭 투하로 인해 7만여명이 사망하고 13만여명이 부상당했다. 폭심지를 중심으로 가옥 7만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당시 폭발이 있은 직후 히로시마의 시가지는 물산장려관으로 쓰였던 현재의 원폭 돔(겐바쿠 돔)만 앙상한 철골을 드러낸 채 페허가 돼버렸다.

그후 59년. 역설적으로 전범국 일본의 히로시마가 받은 원폭의 상처는 히로시마를 '평화'의 도시로 자리매김 하게 했다. 원폭 투하 이후 히로시마 시민들은 도시 재건과 함께 폭심지 인근 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을 조성했다. 매년 8월 6일 치러지는 희생자 위령제에는 수만명의 사람들이 참석해 '핵무기 폐기'와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염원들로 가득찬다.

이러한 역사적인 기원은 히로시마를 일본 내에서도 유독 반전 여론이 높은 지역으로 만들었다. 재일교포 3세들의 단체인 재일코리안청년연합회(KEY) 송승재 공동대표는 "최근 일본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에 대한 일본인들의 여론은 찬성과 반대가 엇비슷하게 나타나는 양상"이라면서 "하지만 히로시마 지역은 반전단체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측면도 있지만 핵의 위험을 체험해본 경험을 여전히 가지고 있어 시민들의 반전과 평화의식은 상대적으로 높다"고 설명했다.

원폭의 도시 히로시마가 평화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히로시마가 원폭의 참상과 피해를 '지우기'보다 '기억하기' 때문이다.

'기억'의 힘

히로시마평화기념관 로비에 세워진 시계. 맨 위쪽의 숫자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후 흘러온 날짜를 나타내고, 아래는 최근 핵폭탄 실험이 있은 후 경과한 시간을 나타낸다.
히로시마평화기념관 로비에 세워진 시계. 맨 위쪽의 숫자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후 흘러온 날짜를 나타내고, 아래는 최근 핵폭탄 실험이 있은 후 경과한 시간을 나타낸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히로시마 중심지에 자리잡은 평화기념공원은 도시인의 쉼터이면서도 평화를 기원하는 학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히로시마 시민들과 세계 도처의 관광객들은 지금은 빌딩으로 가득찬 히로시마의 한복판에서 원폭 투하 당시의 상흔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평화기념 공원 입구에 들어서 있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은 원폭에 대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평화기념관 서관은 피폭자들의 유품과 피폭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자료로 방문객들이 히로시마의 과거를 회상하게 만든다. 두살 때 피폭을 당한 후 백혈병으로 고통받다 8개월만에 숨진 사다코씨가 남긴 건강을 염원하며 접었던 종이학은 원폭 피해자들의 고통을 전해준다.

동관 1층은 피폭 전후의 히로시마를 보여주면서 원폭(핵)의 파괴력을 실감케한다. 동관 2~3층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피해 이후에도 여전히 핵의 공포속에 살아가고 있는 '지구'를 보여주고 있다. 강력한 핵무기로 상대방의 공격을 저지한다는 일명 '핵억제론'의 비논리성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은 최근 공원 한 구석에 '국립히로시마원폭사몰자추모평화기념관'을 건립했다. 지하 1~2층 규모로 건립된 추모관은 각종 원폭피해자 관련 전시물과 세미실을 두고 있는 한편, 원폭 피해로 숨진 사람들의 영정과 기록들을 데이타베이스로 구축해 놓고 있다.

원폭 피폭자들이 숨을 거두게 되면 후손들은 피폭자의 사진을 추모관으로 제출한다. 추모관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피폭지나 피폭자의 이름만 쳐넣게 되면 피폭자들의 생전 사진과 간단한 정보를 컴퓨터 단말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수만명의 피폭자 한사람 한사람을 모두 '기억'하겠다는 히로시마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한 단면이다.

평화기념공원 찾는 한국인이라면 원폭 투하 59주년 되는 올해 우리의 현주소는 어딘지 되물어볼 수 밖에 없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 따르면 한국인(조선인) 피폭자는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각각 7만명(사망 3만5000명), 3만명(피폭사 약 1만5000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중 4만3000여명이 해방 후 남북으로 귀국했지만 현재 남한에는 겨우 2200여명, 북한에는 927명이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러나 귀국한 한국인 피폭자들의 대부분은 일본과 한국 정부 모두에게서 외면을 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 지난 65년 한일회담 당시 과거사 청산은 원폭 피해자를 포함한 전쟁 피해자를 제외한 채 이루어진 반쪽짜리 청산이었다. 그후 지난 90년 노태우 대통령은 방일 당시 일본 정부로부터 40억엔 규모의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이 돈은 과거 배상의 의미보다는 '인도적인 지원' 차원의 성격을 지녔다.

한국 정부는 이 돈을 가지고 매달 원폭피해자들에게 매월 10만원 가량 돈을 건네주고 합천 원폭피해자회관을 지어주는 것으로 '끝'을 냈다. 조선인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은 한일회담과 40억엔 지원을 빌미로한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 모두에 의해 외면당한 것이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 지난 70년 민단의 주도로 건립된 이 위령비는 건립 당시 히로시마 정부의 거부로 공원 내에 건립되지 못하다 지난 90년대 비로소 공원 부지내로 자리를 옮겨 올 수 있었다. 민족차별의 상징물로 여겨지는 이 위령비의 건립 유래는 한국 정부로부터 외면당하는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모습과 비슷하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 지난 70년 민단의 주도로 건립된 이 위령비는 건립 당시 히로시마 정부의 거부로 공원 내에 건립되지 못하다 지난 90년대 비로소 공원 부지내로 자리를 옮겨 올 수 있었다. 민족차별의 상징물로 여겨지는 이 위령비의 건립 유래는 한국 정부로부터 외면당하는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모습과 비슷하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한국 정부로부터 '방치'됐던 피폭자들...

그후 한국인 피폭자들의 권리는 자신들이 직접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일본 정부가 발행하는 원호수첩을 한국인 피폭자가 받을 수 있도록 한 것도 한국인 피폭자들의 노력의 결과였다. 일본 영토외에 거주하는 피폭자들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고 있던 일본 정부를 수차례의 법정 논란끝에 굴복시킨 것도 피폭자 자신들이었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의 상징물인 원폭사망자 위령비. 위령비 사이로 멀리 원폭 돔이 보인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의 상징물인 원폭사망자 위령비. 위령비 사이로 멀리 원폭 돔이 보인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한국청년연합회 대구본부(대구KYC) 김동렬 사무처장은 한국과 일본 정부 모두에게 외면당한 조선인 원폭 피해자들의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은 세번이나 버림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첫번째는 핵공격으로 인한 피폭의 고통을 받으며 버림을 받았고, 두번째는 일본으로 끌려가 피폭을 당했지만 일본 정부로부터 아무러 사과를 받지 않고 방치됐다. 무엇보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국 국민이면서 한국 정부로부터는 아무런 혜택과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됐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원폭 피해자들을 기억하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과거를 잊으려 노력할 뿐이었다."

평화공원과 각종 자료관이 즐비한 히로시마의 한복판에서 평화를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실감케한다. 그것이 평화의 도시, 히로시마의 저력일지 모른다.

지금도 소리없이 숨져가고 있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어디쯤인지 곱씹어 볼 수 밖에 없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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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에 울린 '코리안' 청년들의 외침 "전쟁피해자의 시점에서 평화 만들자"

덧붙이는 글 | 한국청년연합회 대구본부(대구KYC)는 다가오는 2005년 원폭투하 60주년을 앞두고 원폭 피해자들의 생애를 기록하는 ‘평화길라잡이’ 사업에 참여할 자원활동가를 모집합니다.  

평화길라잡이 자원활동가는 원폭 피해자와 일대일 결연을 맺고 피해자들의 심리적 안정을 도모하고, 스스로는 인권의 소중함을 배워 나갑니다. 또한 일본과 한국 정부 모두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원폭 피해자들의 삶을 직접 들으며 이를 기록하는 구술증언 활동을 벌입니다. 

대구KYC는 오는 2월말까지 평화길라잡이 자원활동가를 모집할 계획입니다. 평화길라잡이 자원활동가는 사업 취지에 동의하는 모든 이들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대구KYC는 원폭 피해자들의 구술증언을 기록하는 평화길라잡이 사업에 대한 일반인들의 후원도 받고 있습니다. 

자세한 문의는 대구KYC 053-477-0515 / www.tgky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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