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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천안의 B여고로 진학한 때가 조금 전 같은데 금세 일년이 훌렁 지나고 다음달에는 2학년이 된다.

며칠에 불과했던 겨울방학을 집에 와서 지낸 딸아이가 지난 5일 천안으로 돌아갔다. 원래는 이것저것 가져갈 소소한 물건들도 있고 해서 내 차로 태워다 줄 계획이었으나 날씨가 훼방을 놓았다. 10여 년 전 눈길에 미끄러져 폐차 처리를 했던 경험이 다시금 겁을 집어먹게 해서 딸아이를 버스 태워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한번 가슴이 짠했다. 딸아이가 집에 왔다 간 것이 벌써 여러 번이고, 딸아이를 타지에다 놓고 산 세월도 벌써 일년이 되었건만, 녀석이 집에 왔다 갈 적마다 여전히 내 마음이 쓰린 것은 아비로서의 당연한 이치일 터였다.

내가 애초부터 삶의 자리를 잘못 택한 것만 같은, 아이에게 미안해지는 마음 옆으로 또 한번 고맙고 흐뭇한 마음도 은근슬쩍 자리를 잡는 것 같았다. 지난해 가을 아이의 담임 선생님에게서 받은 전화, 고마운 말씀이 다시 떠오른 탓이었다.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학교 다니는 것도 아닌데, 혼자 어렵게 자취를 하면서도 아이가 공부를 잘해 주어서 저도 기분이 좋고 아이에게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처음부터 성적이 확실하게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꾸준히 상승 곡선을 그리는 것이 참 좋아 보이고 기대가 됩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또 한가지 말을 했다.
"무엇보다도 아이의 성격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차분하고 온순하면서도 주관이 뚜렷하고 생각이 깊은데,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참 좋게 느껴집니다."

나는 딸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참으로 고마웠다. 일삼아 전화를 걸어 그런 좋은 말들을 내게 들려주어서만이 아니었다. 수십 명 아이들의 학교 생활을 관장하는 담임 선생님이 내 딸아이의 수업 성적뿐만 아니라 아이의 생활 태도와 마음씨며 성격까지 깊이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 그 당연한 일이 내게 안겨주는 감동은 정말 크고도 명확했다.

담임 선생님 말씀처럼 내 딸아이가 혼자 자취를 하는 어려움과 외로움 속에서도, 귀찮은 일거리들을 스스로 잘 처리하며 밝고 명랑한 마음으로 공부도 잘해 주고 있으니, 생각하면 참으로 고맙고도 대견한 일이었다.

저녁때 천안의 학교 근처 원룸에 도착한 딸아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잘 도착했어요" 하는 딸아이의 음성에는 특유의 탄력이 있었다. 그 명랑한 말소리가 다시 기특하고 대견하고 고맙게 느껴지면서도 다시금 녀석이 가엾게 느껴지는 감정이 짜르르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지난 일요일 오후에 천안엘 갔다. 딸아이에게 가져다 줄 몇 가지 소소한 물건들이 있어서였다. 천안에 갈 적마다 들르는 해미성지에서 딸아이와 주인댁에도 드릴 물을 길었다. 그리고 5시쯤 딸아이 집에 도착하니 천안시립도서관에서 하루 봉사활동을 했다는 아이는 집에 돌아와 있었다.

전날 서울에 간 아내를 기다리다가 8시쯤 딸아이와 함께 먼저 늦은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9시쯤 아내가 도착한 후부터 세 식구가 둘러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12시쯤 잠을 자기로 하고 세 식구가 한 침대에 나란히 가로눕고 불을 껐지만, 그때부터 꼭두새벽인 2시까지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야 하는 딸아이도, 아침에 다시 먼길 운전을 해야 하는 나도 걱정이 없지 않았으나 세 식구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 잔치를 쉽게 끝낼 수가 없었다. 딸아이의 학교 생활 이야기, 아내의 서울 나들이(어느 지인의 문병)에 관한 이야기, 우리 인생 이야기와 하느님 이야기 등등….

딸아이는 자신이 천안의 B여고를 선택했던 이유를 다시 한번 얘기했다. 오로지 공부 성적만을 최고 가치로 여기지 않고 인성 교육을 중요시하는 학교, 살벌한 경쟁심만이 들끓지 않고 아이들이 여유를 가지고 책도 읽을 수 있는 그런 분위기를 지닌 학교일 거라는 기대와 믿음이 그 학교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라고 했다.

비용 지출이 커진 데다가 아빠가 고생하시는 것을 보면 죄송한 마음 한량없지만, 천안 유학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학교 아이들의 태도에서 실망도 많이 한다고 했다. 아이들이 그 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하나같이 서울대를 비롯한 명문대학 합격률이 높은 것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 얘기 다음에 무슨 말을 좀 하면 좋겠는데, 그것과 관련하는 아무런 얘기가 없어서 너무 허전하고 썰렁하다는 것이었다.

의사를 지망하는 아이들도 많다고 했다. 그런데 의사를 지망하는 이유들이 하나같이 돈과 연결된다는 것이었다. '돈을 많이 벌어 윤택하게 살기 위해서'가 의사 지망 이유의 전부라는 것이었다. 의사 지망과 관련하는, 즉 사회 공동선과 연관하는 좀 더 차원 높은 생각들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한결같이 그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대체로 느긋함이나 여유를 가지지 못하고 너무 조급해하며 불안 가운데서 사는 것 같다고도 했다. 학교에서 학원 이야기도 많이 하고, 어떤 학원이 좋다는 말을 들으면 쉽게 학원을 바꾸는 일도 흔하다고 했다. 한달 수강료를 선불한 상태에서 고작 며칠 후에 학원을 바꾸어도 군말 없이 다시 학원비를 지출하는 엄마들도 많다고 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학교 안에까지 들어와 대기하고 있는 학원 승합차를 타고 부리나케 학원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은 학교에 남아 자율학습을 하는 소수 아이들에게서 더 많은 위협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재미있는 말도 했다.

"아이들 중에는 내가 자취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놀라기도 해요. 자취의 내용을 듣고서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이도 있었다니까요."

그러며 딸아이는 쿡쿡 웃었다.

"한번은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무슨 얘기를 하시다가 박노자를 아는 사람 있느냐고 했어요. '네 하고 대답한 아이는 저 하나였어요. 박노자를 아는 아이가 정말로 나 하나 뿐은 아니겠지만, 그때 혼자 대답을 하면서 내가 너무 외로운 건 아닌가 하는 묘한 생각을 했어요."

딸아이의 그 말을 들을 때는 일순 콧마루가 시큰해지는 것도 같았다. 정말 묘한 감정이었다. 아이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묘한 고독감을 감내하는 상황도 많이 겪을 거라는 생각이 지레 나를 주눅들게 하고 아이가 측은해지는 마음마저 갖게 하는 것 같았다.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 딸아이는 죽음에 관해서 간명하고도 절묘한 표현을 했다.

"죽음은 내 출생의 이유라고 생각해요."

'죽음은 출생의 이유'라는 그 짧은 한마디에 고교생 딸아이의 모든 정신세계가 축약되어 있음을 나는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아이는 자신의 출생이 하느님의 초대에 의한 것이고, 하느님의 초대에 잘 부응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몫이라는 말도 했다. 이 세상을 잘 살아 하느님의 궁극의 초대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가치라는 뜻이 그 말속에는 함축되어 있을 터였다.

"교장 수녀님이 말씀하실 때 '쟤는 왜 또 저리 말이 기니?'라고 하면서 키들거리는 얘들도 있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아이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가운데 자리부터 앉을 줄을 모르고 복도에 떨어진 휴지를 보고도 그냥 지나가는 아이들도 많지만, 전 실망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우리에게는 많은 시간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친구들 모두 앞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들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희망을 갖고 살고 싶어요."

아이가 참으로 소중한 희망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이의 그 희망은 이미 자기 개인 문제를 초월하는, 사회와 세상에 대한 꿈일 터였다.

벌써부터 '출세' 위주의 꿈을 안고, 그 꿈 때문에 강박감 속에서 이기주의로 흐르는 아이들도 많은 상황을 내 딸아이가 겪고 있는 것이 참으로 분명했다. 그 속에서 딸아이가 갖는 현실적인 꿈은 학교 교사에다가 역사학자였다. 장래 교단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꾸준히 공부하여 우리나라 역사학의 지평을 넓혀보고 싶다고 아이는 소박하면서도 담대한 꿈을 말했다. 아이가 그 얘기를 할 때 나는 누운 채로 가만히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조용히 한마디했다.

"네가 좀 전에 말한 '죽음은 출생의 이유'라는 그 생각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돼. 네가 오늘의 그 생각을 잘 유지하고 산다면, 그것은 평생 동안 네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될 거다. 너는 일찍부터 확실한 등불을 가진 셈인데, 그것은 분명 너를 이 세상에 초대하신 하느님의 은총이야."

숙연한 느낌 때문인지 딸아이는 잠자코 있는데 아내가 아이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우리 딸 너무 착하고, 어린 나이에도 어른 같은 생각주머니를 가졌어. 엄마가 고마울 지경이야."

어느덧 밤은 새벽 2시를 지나고 있었고, 숙연한 분위기가 좀 더 쉽게 우리 세 식구에게 잠을 가져다 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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