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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에는 공동체 대안교육연구실 정책 포럼이 있었습니다. 2002년 여름에 2명의 어린이와 나들이 다녀오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대안학교 설립의 꿈까지 나누는 때가 온 것입니다.

2004년 계획에 대한 발제를 마치고, 함께 모인 공동체 지체들에게 대안학교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지를 물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배움터', '아름다운 마을학교', '아름다운 마을배움터' 중에 어떤 이름이 좋을지를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이야기하는데, '학교'라는 이름에 대한 안 좋은 추억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지요. 하지만 그런 '학교'라는 이름의 가치가 회복되기를 원한다는 분들의 의견도 여럿 있었습니다. 결국 어린이들에게 물어서 결정하기로 하였지만, 대안학교팀 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꿈을 나누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대학원 입학이 결정된 후, 지난 11월부터 학원에서 중·고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 전공은 철학이지만, 지방에서 전자공학을 3학년까지 전공한 것을 밑천으로 과학을 가르치고 있지요. 역시 전자전기 관련된 부분을 가르칠 땐 저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쉽고 재밌게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제일 어렵고 건조한 부분이 될 수 있는데 말이지요.

사교육업계에서 학원 강사를 하면서, 대안교육을 꿈꾸는 지체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재미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사교육의 문제가 공론화 되고 있는 즈음에 생계비가 급해서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은 저를 한없이 힘들게 할 수 있는데 말이지요.

'교육'에 '시장'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을 혐오스러워하면서도 '교육'을 '밥벌이용'으로 하고 있으니 얼마나 암담합니까? 석 달이 되어 가는 때에 맞게 된 '대안 교육 포럼'은 다시 한번 "함께 하는 것"의 가치를 감격스럽게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나는 '아이들 성적 올리는 일'에 몸담고 있지만, 공동체의 지체들은 대안교육을 꿈꾼다. 그러므로 나도 함께 대안교육의 꿈을 꾼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2년 간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하지만 외할머니를 포함하여 모든 식구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아왔었지요.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땐가 어디서 그런 자료가 나와서 후손들이 모여서 기념관을 짓는다고 할 때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여섯 살되던 해에 돌아가셔서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으시지만 외할아버지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있으셨답니다.

"공부는 해서 무얼해"

지식인이 겪어야했던 고통스러운 역사를 살아온 자조 섞인 한마디로 늘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사춘기 시절에 본 미니시리즈 중에 '춘원 이광수'가 기억납니다.

문성근씨가 이광수 역을 맡았었지요. 그 중에 '배운 것이 병이 되어'라는 소제목이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가 기억하시는 외할아버지께서 늘 하시던 말씀과 연관해서 많은 고민을 하였었지요.

"일제시대의 지식인들은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외할아버지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외삼촌도 물론이고 어머니도 못 배우셨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 하신 학문에 비하면 정말 배우지 못하셨지요. 그 시절을 살아오신 분들은 대부분 못 배운 것과 관련한 아픔이 공통적으로 있을 겁니다.

저는 공부의 중요성을 어릴 적부터 각인 받아서인지 열심히 공부하였지요. 그런데 좀 지나쳤는지 고등학교 1학년 때 아파서 학교를 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12년 다닐 '학교'를 13년을 다니고, 대학교를 진학하였습니다.

취직이 거의 걱정이 없는 지방 국립대 전자전기공학부였지요. 제 동기들은 벌써 대기업에서 안정된 연봉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나 봅니다. 그런데 저는 왠지 그렇게 살기가 싫었지요. 너무 건조한 전공에 틀에 짜여진 생활, 뻔한 미래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후로는 교회 청년부 회장을 하면서 누적된 '교회에 대한 문제의식'까지 맞물려서 결국 대구 생활을 접고, 서울로 올라와 지금의 공동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전공도 철학으로 바꾸어서 편입을 했지요.

공동체에서 '이 땅의 역사'와 '교회가 이 땅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해 다시 배우고 공부하면서, 배운 것이 병이 된 외할아버지의 울분과 못 배운 게 한이 된 어머니의 눈물을 가슴에 묻어 두고 열심히 살아가기로 하였습니다.

북한산아래 수유리 골짜기에서 두 명의 환경운동을 하는 형들과 기독교 대안언론 기자인 형과 살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공부 중이구요. 공동체적 삶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늘 깨닫지만, 한편으로 개인주의적 습속이 내안에 얼마나 뿌리 깊은 가도 날마다 자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안교육팀에서 공동육아를 같이 할 지체들을 찾는 다는데 함께 할까 생각중입니다.

"애들과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그 편견을 막 벗어나려는 즈음에 맞게 된 좋은 기회인 것 같습니다. 함께 배우고, 함께 놀며, 함께 꿈꾸며 옹기종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요.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별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 가려 하네
아름다운 꿈꾸며 사랑하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 가네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꿈꾸지 않으면 (양희창 작사, 장혜선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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