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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 고성 안의 건물. 고풍스러운 모습이 눈을 사로잡는다.
여강 고성 안의 건물. 고풍스러운 모습이 눈을 사로잡는다. ⓒ 최성수
10시 45분에 대리를 떠난 승합 버스는 세 시간 만에 려강(麗江)에 도착합니다. 세 시간 내내 좁은 자리에 끼여 발 한 번 길게 뻗지 못하고 차를 탔습니다. 그래도 나는 작은 키라 괜찮았지만, 내 양 옆에 앉은 서양 청년들은 그 긴 발을 주체할 길이 없어 세 시간 내내 안절부절 했습니다.

비 내리는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키 작은 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을 넘어, 안개 자욱한 곳에 여강은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여강은 나시족의 옛 마을입니다. 성 안에 들어서자 내 눈은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몰라 휘둥그레집니다.

성에는 처마와 처마가 끝없이 이마를 맞대고 있습니다. 그리고 길을 따라 수로가 흐릅니다. 들여다본 수로의 물은 더할 나위 없이 맑습니다. 그 맑은 물가로 수양버들이 드문드문 늘어서 있습니다. 고풍 어린 아치형 다리들도 곳곳에 놓여 있습니다.

골목과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고,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노래를 부릅니다. 후루스라는 표주박 모양의 악기로 연주하던 고음의 그 노래입니다. 길의 바닥돌은 숱한 사람들의 발길에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고, 길을 따라 자리 잡은 가게들에는 나시족의 글자인 동파문자(東巴文字) 간판이 고운 색으로 걸려 있습니다.

만고로에서 바라본 여강 고상의 전경. 집과 집이 하늘을 가릴 듯 늘어서 있다.
만고로에서 바라본 여강 고상의 전경. 집과 집이 하늘을 가릴 듯 늘어서 있다. ⓒ 최성수
동파문자는 상형의 글자입니다. 그래서 그 간판은 마치 그림과 같습니다. 그 문자를 보고 있으면 나시족은 천부적인 예술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숙소를 잡기 위해 유스 호스텔인 <청년여관(靑年旅館)>을 찾아갑니다. 청년 여관 역시 골목골목을 돌아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기와를 곱게 얹은 고색창연한 숙소로 들어서며 나는 문득 영화 <신용문객잔>을 떠올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곳곳에 늘어선 여관의 이름 대부분이 객잔(客棧)이라고 써 있으니까 말입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우선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아갑니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꺾이는 골목마다 특징이 될 만한 것들을 기억해 둡니다. 그래도 나는 고성에 있는 내내 자주 길을 잃곤 했습니다.

우육관(牛肉館)인 그곳은 온통 쇠고기 요리뿐입니다. 중국 식당은 거의가 돼지고기 요리가 중심인데 이상하다 생각하며 들어가 보니, 회족(回族)식당입니다. 회족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니, 쇠고기나 양고기 요리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요.

고성의 가운데인 사방가를 거니는 사람들
고성의 가운데인 사방가를 거니는 사람들 ⓒ 최성수
우리로 치면 도가니 수육과 같은 요리와 감자, 야채 볶음 등을 시켜놓고 늦은 점심을 먹는데, 옆자리의 한 서른 남짓 되어 보이는 중국인이 국수 비슷한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혹시 국수면 한 그릇 시킬까 하고 물어보니, 국수가 아니라 쇠고기 요리랍니다.

그 말붙임을 계기로 그 중국인과 우리는 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실제로는 중국 유학중인 송희와 그 중국인의 대화였고, 우리는 송희의 통역을 통해 간접 대화를 한 셈입니다), 그는 30대 중반의 게임 소프트웨어 회사 사장이랍니다. 현재는 이혼을 한 상태고, 려강에 와서 열흘째 머무르고 있는데, 자기가 다녀본 곳 중에 이곳이 가장 마음에 들어 더 머물 생각이라고 합니다.

“나 한국에 가본 적이 있어요.”

그는 자랑스레 우리에게 그런 말도 했는데, 그 다음 말이 더 걸작입니다.

“한국에 가서 며칠 머물 생각이었는데, 도착한 첫 날 파친코 장에서 만 원을 잃었어. 그래서 한국 구경도 제대로 못하고 그냥 돌아왔지.”

중국돈 만원이면 우리 돈으로 약 150만원인데, 이 중국인 통도 크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한편으로는 사실일까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그는 자기가 여강 고성 지리를 잘 아니 안내를 해주겠다며 우리를 이끕니다. 우리는 그가 이끄는 대로 여강 고성의 골목 골목을 돌아 사방가(四方街)에 이릅니다.

사방가는, 나중에 알고 보니, 여강 고성의 모든 골목의 시작이면서 끝인 곳입니다. 사방가를 통해 여강 고성 안의 모든 골목이 시작 됩니다. 그러니 중심이 되는 골목을 따라 계속 나오면 사방가에 이르게 됩니다(물론 골목에 또 다른 샛골목이 워낙 많아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고성 수로에 세워진 다리
고성 수로에 세워진 다리 ⓒ 최성수
사방가 주위로는 제법 큰 수로가 흐릅니다. 들여다보면 맑디맑은 물이 마치 우리네 도랑물처럼 쉬지 않고 흘러갑니다. 수로에 내려가 빨래를 하는 아주머니들도 간간히 보입니다.

사방가에 이르러 우리는 그 중국인과 헤어져 만고로(萬古路)로 갑니다. 만고로 위에서는 여강 고성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그 끝도 없이 이어진 집과 집, 어디 한 군데 하늘을 바라볼 빼곡한 틈도 없어 보입니다.

그저 감탄만 하다 내려와 고성 안의 다른 골목들을 둘러봅니다. 사방가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은 온통 상가들입니다. 그리고 그 상가들은 대부분이 나시족의 문자인 동파문자로 만든 물건들을 팔고 있습니다. 목조각에도 티셔츠에도, 색색의 상형 문자인 동파문자 천지입니다. 동파 문자로 도장을 새겨주는 곳도 있습니다.

동파문자로 새겨진 고성 안 가게의 간판
동파문자로 새겨진 고성 안 가게의 간판 ⓒ 최성수
아직도 이런 그림 같은 글자가 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해 우리는 발길을 옮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와 동시에 그 수많은 고성 안의 집들에 등불들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 고성 안은 또 다른 밤의 경치로 변신을 시도합니다.

수로를 흐르는 물에 비친 등불의 영롱하고 신비로움이 가슴을 탁 막히게 합니다. 수로 군데군데 놓인 다리의 둥근 아치형 모양이 등불에 얼비쳐 아름다움을 더합니다.

자식이 하나도 없는 돈 많은 할머니가 자신의 재산을 다 털어 놓았다는 다리 이름은 만자교입니다. 다리를 건너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 자신의 자식이라고 생각했다는 할머니의 마음이 만자교(萬子橋)라는 이름에 남아있는 것이겠지요. 여강 고성에는 그런 다리들이 수로를 따라 놓여 있습니다.

고성 구경에 정신을 빼앗겨 끼니 때도 놓친 늦은 밤, 사방가 근처의 한국인 식당 벚꽃마을로 밥을 먹으러 갑니다. 식당 안은 사람들로 시장판처럼 북적댑니다. 겨우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음식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가와 인사를 합니다.

아까 점심 먹을 때 식당에서 본 중국인입니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는 친구 부인과 함께 왔다며, 괜찮다면 친구 부인을 보내고 우리와 합석하고 싶다고, 자기가 오늘 한 잔 사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그런 그를 곰곰 뜯어보니 수상쩍은 곳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중히 거절을 하자, 그는 아랑곳 않고 우리 자리에 앉더니 무어라고 마구 떠들어 댑니다. 알고 보니,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마음에 든다고, 함께 즐기자며 추근대는 것입니다.

고성 안 상가. 1층은 상가, 2층은 살림집이다.
고성 안 상가. 1층은 상가, 2층은 살림집이다. ⓒ 최성수
단호한 얼굴로 그를 보내고 나자 괜히 마음이 찝찝합니다. 여강 고성 안에는 그 중국인처럼 헌팅을 위해 머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곳에 와서 그 아름다움을 볼 줄 모르고 엉뚱한 생각이나 하는 사람들은 어디나 있는 법인가봅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 때문에 고성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가보지 못한 골목을 따라 이곳저곳의 밤 경치를 만끽합니다. 골목 끝까지 걸어가 상가가 아닌 인가에도 가보지만, 골목이 얼마나 더 이어져 있는지 몰라 되돌아서고 맙니다.

그렇게 몇 군데를 헤매다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그만 길을 잃고 맙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거기가 거기 같고, 되돌아 나오면 길은 다시 엉뚱한 곳으로 이어집니다.

한동안 헤매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우리 숙소를 대주고 길을 묻습니다. 그도 우리가 찾는 곳을 모르는지, 청년 여관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자 가지고 있는 핸드폰으로 친절하게 전화를 해서 길을 가르쳐줍니다.

아까 치근대던 사람 때문에 쌓였던 중국 사람에 대한 나쁜 인상이 그 친절한 아저씨 때문에 씻겨 내려가 버립니다.

여강 고성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 유산의 하나라고 합니다. 수로의 물은 흑룡담 공원 쪽에서 흘러오는데, 고성의 청소와 화재 시 불끄는 용도로 쓰인다고 합니다. 고성 전체가 목조 건물로 다닥다닥 이어져 있어 한 번 불이 나면 아주 위험한 상태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수로가 아주 중요하다고 합니다.

고성 안을 흐르는 수로의 하나. 수로 양 옆으로 집이 늘어서 있다.
고성 안을 흐르는 수로의 하나. 수로 양 옆으로 집이 늘어서 있다. ⓒ 최성수
나시족의 중심 도시였던 이 곳도 이제는 한족을 비롯한 다른 민족들이 모여들어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여강 고성은 여전히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1990년대 후반, 운남성에 심한 지진이 일어났을 때 이곳도 상당히 파괴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새로 치장하는 건물들은 하나하나 수공업적으로 짓고 있는 것을 보면, 오래도록 여강 고성은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쓰레기차나 응급차가 아니면 고성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것도 고성을 고성으로 유지시키는 요인의 하나일 것입니다.

문 닫는 가게들을 지나 숙소로 돌아와 여강의 첫 잠을 청합니다. 이름처럼 고운 곳, 여강. 그 여강에서의 밤 꿈결 속에 나는 또 길을 잃고 헤매는 꿈을 꿉니다. 늘 찾아 헤매기만 하면서 한 번도 찾지 못하는 곳, 그곳이 여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복숭아꽃 물 위에 떠 아득하게 흘러내리는 봄철에 수로를 따라 걷고 싶은 곳, 버들잎 피는 시절에 나시족 음악을 흥얼거리며 돌아다니고 싶은 여강 고성의 골목길을 마음에 간직하고 일어난 아침, 내가 묵은 숙소 2층의 베란다에서 바라본 옥룡설산에는 눈부신 햇살과 함께 시린 눈이 가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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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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