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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9일 오전 9시. 휠체어장애인을 비롯한 중증, 경증의 장애인과 가족, 자원봉사자들 60여 명이 꿈의 철도라고 하는 고속철도 시승식에 참가하기 위해 용산역에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이들은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아래 이동권연대)가 한국철도시설공단(이사장 정종환)의 고속철도 시승 행사에 참가신청을 해 마련된 자리다.

이날 시승식에는 이동권연대를 비롯한 한국자립생활네트워크, 양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프랜드케어, 피노키오 자립생활센터 등 많은 단체들이 참여했다.

▲ 승무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애인단체 관계자들
ⓒ 이철용

들뜬 설래임, 그러나 좌절의 연속

삼삼오오 모여든 장애인들의 얼굴에서는 꿈의 철도에 대한 기대가 얼굴에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고속철을 이용하기 전에 발생했다. 집결장소인 용산역 신청사 3층까지 올라오는 길이 장애인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콜택시를 타고 왔다는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조하나씨는 엘리베이터가 없어 3층까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왔다고 한다. 아니 탔다기보다는 역무원이 휠체어를 잡고 뒤로 돌아 아슬아슬하게 계단에 매달려 온 것이다.

뒤따라오는 승객들과 오랜 시간 마주봐야하는 무안함은 참을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유모차를 들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것도 금지되어 있는데, 하물며 성인이 탄 휠체어를 들고 에스컬레이터를 탄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가. 자칫 바퀴가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그 결과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 고속철에서 만나는 첫 난관 계단, 장애인들은 이 계단을 보는 순간 한숨을 내쉬었다.
ⓒ 이철용
이날처럼 다수의 장애인이 지하철이나 기차를 이용하려면, 두 명 들어가면 꽉 차는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한없이 줄지어 기다리거나, 직원들이 올 때까지 리프트 앞에 서 있거나 조하나씨처럼 사람들을 마주 보고 역무원에게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한다. 그래도 이 정도는 고속철을 타면서 겪어야 했던 고생에 비하면 애교에 불과했다.

9시 10분. 3층에 집결한 시승단은 1층 플랫폼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모였다. 3개 텔레비젼 방송사는 물론이고 언론의 카메라와 기자들이 정신없이 장애인들을 에워싼 가운데 이동권연대 박현 사무국장은 들떠있는 시승단에게 "우리의 목적은 고속철 탑승이 아니라 장애인이 고속철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는지 평가하는 것이 목적"이라며 차분하게 시승에 임할 것을 부탁했다.

승강장으로 내려가기 위한 엘리베이터는 1개, 그것도 휠체어 2대가 겨우 들어갈 정도의 좁은 엘리베이터에 30여대의 휠체어가 질서 있게 승강장을 향했다. 일부 자원봉사자들은 장애인을 엘리베이터에 맡기고 계단을 달리는 모습도 계속 목격되었다. 60여명의 시승단이 다 승강장으로 내려가기도 전에 승강장 앞에서는 탑승을 놓고 고속철 관계자들과 장애인들의 높은 언성이 이어졌다.

휠체어 들어갈 수 없는 고속철, 장애인들 '아연실색'

▲ 수동 휠체어도 좁은 통로로 인해 접근할 수 없다.
ⓒ 이철용
3층에서 1층 승강장으로 내려오는 것도 문제였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9시 40분에 출발 예정이던 고속철은 10시가 훨씬 넘어서도 떠나지 못했다.

한국자립생활네트워크 최용기 대표가 수동휠체어를 가지고 시승을 시도했지만 고속철의 문은 80cm, 그러나 객차 내부 좌석사이의 통로는 47cm. 수동휠체어는 몇 번 진입을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물론 승강장에서 고속철까지의 진입도 경사로가 마련되지 않아 휠체어를 들어서 올리기는 마찬가지.

최 대표는 "많은 돈을 들여서 4월 1일 개통을 앞두고 있는데 편의시설을 전혀 갖추지 않고 무궁화호에도 있는 경사로도 없고 통로도 좁다. 21세기 철도가 개통을 앞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얼마나 장애인을 차별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고 말했다.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한 시승단은, '이렇게 해 놓고 왜 불렀느냐'며 분노를 표했지만, 승무원들은 기왕 이렇게 된 거 시간도 늦었으니 일단 타라'고 재촉했다. 일반 시승단도 출발시간이 지연되자 밖에 나와 사태의 추이를 살폈고 혹시나 있을 사태(?)를 우려한 경찰들도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 승무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애인단체 관계자들
ⓒ 이철용
고속철 승무원들은 출발을 계속 지연시킬 수 없다며 휠체어를 놓고 업혀서 타든 아니면 시승을 포기하라고 종용했다. 참가단 사이에서도 장애인들에게 휠체어를 놓고 타라는 것은 말이 안되는 처사라며 탈 수 없다는 주장과 수모를 감수하고라도 승차해서 그 부당성을 알려야 한다는 의견이 첨예하게 맞섰다.

집행부의 토론 가운데 일단 업혀서라도 탑승을 하고 부당성을 알리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리고 모든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용산역에 세워둔 채 업히거나 안겨서 고속철에 승차했다.

하나뿐인 장애인 화장실, 그나마 사용 불가능

▲ 휠체어를 놓고 업혀 열차에 타는 장애인들, 일부는 승차를 포기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 이철용
거의 1시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올라탄 고속철 안은 삼삼오오 시승을 즐기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싸온 음식을 꺼내놓고 소풍을 나온 듯 들떠 있었다.

하지만 장애인 참가자들은 간식을 삼간다. 물론 이들은 고속철을 평가하러 왔고, 또 한 편으로는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아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화장실을 가는 것이 두려워 맘껏 마시거나 먹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다행히 화장실까지 간다해도 문제가 끝난 건 아니다. 단 한 개뿐인 장애인 화장실. 이 곳에는 전동 휠체어가 들어가지 않는다. 아니 뇌성마비 장애인에겐 화장실 문손잡이를 돌려서 여는 것조차 힘겹다. 시범을 보이기 위해 화장실 앞에 선 양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황백남 씨는 문을 열기 위해 한참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어렵사리 문은 열었지만 전동휠체어가 들어가고 나니 문이 반밖에 닫히지 않는다. 장애인 화장실 내부 공간에서 휠체어를 돌릴 수 없기 때문에 휠체어의 팔걸이가 가로막혀 양변기에 앉는 것은 고사하고 벽에 붙은 보조장치를 잡을 수도 없다.

힘들게 팔걸이를 잡았다 해도 휠체어 팔걸이를 뛰어넘어 양변기로 몸을 옮기자면, 수퍼맨 같은 초능력이 필요하다. 고속철 팜플렛에 쓰인 '포항공대 연구보고서(한국인의 체형에 맞는 차량내 공간 배치에 관한 연구)에 입각한 설계 및 배치'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물론 객차와 객차 사이의 문도 스위치 높이가 너무 높고 손으로 틀어야만 자동으로 열리게 되었기 때문에 장애인이 혼자서는 이용할 수 없는 무용지물이었다.

"휠체어 장애인은 두 사람 밖에 못 탑니다."

▲ 객차 내의 통로 47cm는 일반인이 걷기에도 힘들다.
ⓒ 이철용
보조석까지 합쳐 1000석에 가까운 좌석 중에 장애인석은 단 두 석. 탑승자들은 어렵사리 2호차의 장애인석에 3대의 휠체어를 실었고 나머지 휠체어를 용산역 플랫폼에 버려 둔 채 의자에 앉아야 했다.

이 날은 특별히 장애인 수가 많아 휠체어를 다 실을 수 없었다고 하자. 하지만 개별적으로 두 명 이상의 장애인이 탑승을 하러 왔을 때, 누군가는 전동휠체어를 놓고 타야 한다면 어떻게 할까. 이 날은 시승이었으므로 대전까지 갔다가 하차하지 않고 바로 돌아왔지만 정말 여행을 간다면 목적지에서 휠체어 없이 어떻게 이동할 것인가?

장애인들이 먼 길을 혼자 이동하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전동휠체어 장애인들은 절대 두 명 이상 고속철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고속철의 장애인 석은 오직 두 석 뿐이니까. 그러나 그나마 2개의 장애인 좌석도 허울뿐인 장애인석이었다.

시승식에 함께 동행한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의 조사단은 열차의 곳곳을 다니며 자를 대가며 편의시설과 관련한 조사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속철의 편의시설은 낙제점이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객차 사이에 위치한 자판기, 전화기 등은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들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높이 등에 있어서 접근이 불가능했다. 장애인 화장실은 말뿐 일뿐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장애인 혼자서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 자판기의 높이, 휠체어 장애인에겐 너무 높아...
ⓒ 이철용
16호 일반석에 탑승한 장애인들은 한 때 "이동권을 보장하라"며 구호를 외치며 고속철의 기만성에 항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오전 11시 30분 고속철이 대전역에 도착하자 김세호 철도청장이 장애인석으로 찾아와 "오늘 오실 때 불편을 끼쳐 미안하다. 앞으로 개통하기 전에 고칠 것이 있다면 고치겠다. 다음에도 같이 점검할 수 있도록 하겠고 지적한 부분들은 상의해 고치도록 하겠다. 마음을 푸시고 현재는 준비상태라 불편이 있는데 기회를 달라"고 했다.

이에 대해 이동권연대 박현 사무국장은 "이동권과 관련해서 수없이 많이 철도청장 면담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만날 수 없었는데 많은 언론이 와서 그런지 직접 대전까지 내려와 만난다는 것에 씁쓸하다"며 앞으로 이동권 확보를 위한 구체적인 투쟁 방법들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했다.

대전을 출발한 고속철이 다시 용산역을 향해 돌아오는 길에 여승무원들이 기념 볼펜을 나눠줬다. 그러자 한 장애인이 일침을 가한다. "이런 거 주지 말고 시설을 제대로 해 놔요. 우리는 이런 거 받고 싶지 않아요"라고 서운함을 토로했다.

한 장애인은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역무원의 도움을 받으려 했지만 역무원은 보이지 않았고 인형 같은 차림을 한 여승무원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기다림 뒤 장애인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다.

고속철 관계자, "이렇게 혼란스러울 줄 알았으면 장애인 시승식 안했을 것"

▲ 장애인석도 휠체어가 제대로 위치하지 못하고 있다.
ⓒ 이철용
철도청 측에서는 이와 같은 사태를 예상이나 했을까. 고속철도 시승 관련 부서 직원은 한 마디로 "애초 신청 인원은 40명이었는데 실제로는 60명이 왔기 때문에 매우 곤혹스러웠다"고 답했다. 그러나 장애인석은 두 석뿐인데 40명이나 60명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는 또 "이렇게 혼란스러울 줄 알았다면 아예 시승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비장애인들도 단체로 이동하다보면 종종 예기치 않는 일들을 겪기 마련이다. 하물며 몸이 불편한 이들의 경우는 말 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철도청측은 "장애인만 별도로 초대를 하든가 했으면 오늘처럼 시간이 지연되어 다른 손님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했다. "왜 시간이 지연되었는 줄 아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대답이 궁색해진다. 시간이 지연된 것은 장애인들이 늑장을 부려서가 아니라 고속철의 시설 때문이라는 것을 담당자도 알기 때문이리라.

철도청측은 사전에 장애인들이 온다는 통보를 받았지만 이들이 휠체어를 타는지 시각장애를 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안 했다. 혹시 장애인들이 시승식을 마치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너그럽게 웃어줄 생각은 아니었을까. 분명히 40여명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단 두 석의 장애인 석을 당당하게 들이밀었으니 말이다.

특실에 가 보았다. 전 차량 중 특실은 세 량. 그 곳은 좌석도 넓고 이동도 한결 편했다. 몸을 가누지 못해 비좁고 불편하게 앉아 있는 이들에게 왜 특실을 주지 않았을까. 시승은 무료이므로 아무나 특실에 앉을 수 있었는데 말이다. 시승 관련 담당자는 "자신의 착오였다"고 말하며 "특실은 한 량의 좌석이 25석뿐이라 모두 같이 앉을 수 없으므로 일부러 일반석을 배려한 것"이라고 했다.

사용자는 불편한데 "설계는 완벽하다?"

▲ 주인은 떠나고 남겨진 휠체어들
ⓒ 이철용

고속철의 일반석은 좌석이 뒤로 젖혀지지 않고 방향회전도 안 된다. 덕분에 긴 여행의 경험이 없는 장애인들이 2시간 내내 뒤로 오면서 어지러움을 참아야 했다. 처음 출발했을 때는 역무원에게 부탁해 몇 명이 자리를 옮겼지만 돌아올 때는 미안해서 말을 못하고 꾹 참고 왔다. 비장애인들이야 가끔 머리를 식히러 나갈 수도 있지만 한 번 앉으면 꼼짝없이 끝까지 가야하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의구심에 대해 시설 관계자는 "프랑스의 고속철은 원래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서상 고정좌석은 맞지 않다고 저희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용역을 맡은 포항공대 측은, "길어야 두 시간 정도 타는 기차이고, 좌석을 돌리려면 더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많은 수의 승객을 싣기 위해 좌석을 고정시키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라고 했다. 한 마디로,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승객의 편의는 뒷전으로 돌렸다는 이야기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10년 계획 고속철. 그러나 장애인은 뒷전

12시 30분. 시승식을 마치고 다시 모인 이들은 간단한 평가회를 가졌다. 박현 사무국장은 "국가가 10년을 계획해 내놓은 고속철이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느냐"며 유감을 표했다. "내 주변에서 고속철을 타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 권해 주지 않겠습니다." "이런 시설을 해 놓고 타라는 것이 어처구니없을 따름입니다." "개통 한 달을 앞 둔 지금, 무엇이 얼마나 달라질 지 모르겠습니다." 참가자들의 평가는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철도청 시설관리부서 관계자는, 이날뿐만 아니라 그 동안에도 현재의 미비한 시설에 대해 많은 불평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앞으로 2년간은 계약상의 문제로 잘못을 시정할 수 없다고 답했다.

어쩔 수없이 2년간은 지금의 상황을 참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고속철 관계자들이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늦었지만 개선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개선이 있을 때까지 또 얼마나 기다리고 힘들어해야 할까. 또 정말 그들이 개선의 의지를 실천으로 옮길 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장애인인터넷신문 위드뉴스(http://with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위드뉴스에서 관련 동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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