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북한의 나진-선봉지역에서 ' 장로님' 으로 통하는 신종현(사진 오른쪽에서 네번째)씨가 1999년 6월 빵공장을 설립하고 가진 시식회에서 '만나빵'을 앞에 놓고 기념촬영을 하고있다.
북한의 나진-선봉지역에서 ' 장로님' 으로 통하는 신종현(사진 오른쪽에서 네번째)씨가 1999년 6월 빵공장을 설립하고 가진 시식회에서 '만나빵'을 앞에 놓고 기념촬영을 하고있다.
신씨는 1997년 9월 선교 목적으로 4명의 동료들과 밀가루 80톤을 싣고 북한 나진에 들어갔다가 북한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빵공장을 설립할 결심을 하게 됐다.

처음 신씨는 알음알음으로 휴스턴 지역의 미국 기독교 연합회에 도움을 구했는데, 뜻밖에도 쉽게 좋은 답변을 얻어냈다. 미국 기독교 연합회에서 빵 기계 등 재료 일속을 도와 주겠다고 약속한 것. 이에 신씨는 즉시 북한에 들어가 나진시 당국과 계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북에서 돌아온 지 사흘만에 기독교 연합회 측은 당초 약속을 전면 취소하고 말았다. 북한으로 선적하기 불과 열흘전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계약을 하고 기뻐하던 나진시 당국자들의 얼굴과 북한의 어린이들이 떠올랐다. 특히 나진시 당국자들은 처음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신씨의 '불순한' 의도를 알고 빵공장 계획을 거부했으나, 신씨가 '순수하게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빵공장을 설립하겠다'고 설득해 겨우 마음을 돌려 논 터였다.

이때 신씨는 새로운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네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음성을 듣게 된 그는 다른 친구 한 명과 은행 융자를 얻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인 교회들을 돌며 모금, 3만2000불에 해당하는 빵기계를 구입해 1999년 초 나진항을 향해 선적시켰다.

곧이어 신씨는 주변의 동료 6명과 함께 만나선교회를 조직했고, 그 해 6월 13일 빵공장을 설립해 하루 3000개씩 빵을 생산, 나진시 유치원 어린이들에게 공급했다.

빵공장을 설립했다고 해서 매일 빵을 공급하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빵 제조 기술자가 필요했다. 수소문 끝에 어렵사리 3명의 빵 제조 기술자를 구했는데, 신씨는 여기서 감동스런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유명한 '왕여사 이야기'다.

3명의 빵 제조 기술자 중 남편이 중국 공산당원인 중국인 왕 여사는 나진 빵공장에 들어가 1년만 일하기로 계약했다. 그러나 그녀는 놀랍게도 계속 남아서 무보수로 일하겠다고 선언했다. 북쪽의 비참한 현실을 본 그녀는 중국 본토에 있는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아서 봉사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빵공장에 빼앗긴 부인과 부인을 끌어들인 신씨를 원망하며 술로 날을 지새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를 깊게 사랑했던 남편은 차츰 신씨와 그녀의 고결한 뜻을 이해하게 됐고, 결국 "신씨가 믿는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겠다"라며 부인과 함께 세례까지 받았다고 한다.

신씨의 가족들은 처음, "그만큼 고생했으면 은퇴 생활을 즐겨야지 웬 생뚱맞은 짓이냐"고 핀잔을 주며 반대했다고 한다. 한때 휴스턴 지역에 미용 재료상을 5개나 갖고 있으면서 '돈을 갈퀴로 긁어 담아도 될 만큼' 수입이 좋았지만, 그마저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신씨는 현재 집 한 채가 달랑 남아 있는데, 이마저도 지난해 15만불에 저당잡혀 나진에 진료소를 건설하는데 투입했다.

지난해 <코리아 위클리> 주최 우리민족서로돕기 모금 골프대회 참관차 플로리다에 온 신씨는 "옛날 엄청난 돈이 벌릴 때는 큰 호수에 물이 거의 차서 넘실대고 있는 느낌으로 살았는데, 지금은 (집 한채 밖에 없지만) 물이 넘쳐나서 콸콸 흘러 내리는 느낌으로 살고 있다"고 기쁨에 찬 고백했다. 그는 또 "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 가슴이 항상 뜨겁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신씨가 초기에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시작한 빵공장은 규모가 커져 2001년 2월부터는 하루 1만2000개의 빵을 생산해 나진-선봉 지역 유치원과 고아원에 무료로 공급하고 있다. 이를 돕는 단체들도 현재 60여개 교회 단체로 늘어났다. 신씨는 나진-선봉지역에서 북한 사람들에게 '장로님'으로 통한다.

1999년 6월 신종현(사진 뒷줄 맨 오른쪽)씨가 나진 지역에 있는 한 유치원을 방문해 어린아이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99년 6월 신종현(사진 뒷줄 맨 오른쪽)씨가 나진 지역에 있는 한 유치원을 방문해 어린아이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신씨는 빵을 나눠주는 일을 통해 북한의 또다른 현실에 눈을 뜨게 됐다. 굶어 죽는 사람들 외에 폐결핵 등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신씨는 미국 각 지역을 돌며 "현재 북한에는 약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줄을 서고 있다"며 "단 1불짜리 약만으로도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며 도움을 호소했다.

의외로 반응은 컸다. 이미 4년여에 걸친 신씨의 성과를 본 미국의 자선단체들이 의약품을 대량으로 지원해 주겠다고 나선 것. 이렇게 해서 처음 선적하게 된 약품이 200만불어치. 이후로도 약품을 대주겠다는 단체들이 속속 늘어났다.

그러나 이에 만족할 신씨가 아니었다. 드디어는 종합 진료소를 짓겠다고 나섰는데, 이 때에도 모두가 '꿈같은 이야기'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해결해야 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부지를 물색하는 것과 운영권에 관한 것, 막대한 자금은 물론 의료진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등등 난제가 밀려 왔다.

신씨는 모금하는 일과 함께 '가슴이 뜨거운 의사를 찾는다'며 미주지역 동포 은퇴 의사들, 중국 조선족 의사들, 심지어는 한국쪽 의사들도 찾아 나섰다. 그리고는 지난해 10월 9일 새 빵공장과 노트 공장 등을 포함해 연건평 1400여 평에 30개 진료병동 규모의 '신흥종합진료소'를 완공했다. 현재 이 진료소에는 10여 명의 북한 의료진과 20여 명의 조선족 의료진이 상주하며 봉사하고 있다.

4대째 이어지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밋밋하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죽을 병에서 깨어난 후 신씨는 '이웃 사랑'을 다짐했다고 한다. 그의 이웃사랑은 집안 대대로 내력이 깊다. 일찍이 그의 증조 할아버지는 기독교를 받아 들인 후 종문서를 불태우고 재산을 분배했으며,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역시 돈을 벌어들이는 족족 나눠주기에 바빴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늘 "많이 가진 자는 많이 빚진자"라고 했다고 한다.

늘 나눠주는 것만 보고 자라온 그가 굶주린 북한 동포들에게 빚진자 의식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F학점을 면하기 위해 뛰어 다닌다"고 털어놓았는데, 그동안 그의 행로로 보아 이는 '잔뜩 짊어진 빚을 갚기 위해 뛰어 다닌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결국 그가 종종 말했던 '가슴 뜨거운 자'란 '이웃에 대해 빚진자 의식을 가진 자'라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북녘 동포들을 돕기 위해 신씨를 중심으로 엮인 미주 만나선교회는 올 4월 19일부터 20일까지 캘리포니아 프레스노에서 5차 총회를 갖는다. 신씨가 가고 없는 만나선교회는 앞으로 신씨가 북녘동포들에게 새긴 뜨거운 불꽃을 이어 받아 큰 불을 일으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발행되는 코리아 위클리(한국주간) 2월 26일치에도 실릴 기사입니다. 이 기사를 북녘동포들을 위해 불꽃으로 살다 간 신종현 장로님의 영전에 바칩니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