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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로 향하다.
체코로 향하다. ⓒ KOKI
여행 떠나오기 전 ‘잘 갔다 오라’며 푸근한 한마디 전해주시고, 여행길 적적하지 말라고 차(茶)도 한 움큼 넣어주셨던 선생님. 정작 여행을 떠나올 때는 몰랐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생각, 친구들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멀리 떠나오니 비로소 그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겠지요, 더 간절해지는 것이겠지요.

프랑크푸르트를 시작으로 쾰른과 암스테르담, 베를린 등을 거쳐 왔습니다. 유럽 대륙을 바깥쪽으로 크게 돌아오는 동안 위도 높은 유럽의 겨울을 지나고 있어서 그랬을까요? 내내 날씨가 좋지 않았습니다. 해를 볼 수 있는 날이 며칠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낮에는 오랜만에 해를 볼 수 있었답니다. 참 반갑더군요. 얼마 전 한국을 비춰주고 왔을 태양이 저희들 머리 위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일견 무척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8시간의 시차밖에 나지 않는 한국과 독일. 이곳에 뜬 태양이 마치 한국에는 별 일 없노라고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햇살 그득했던 하늘이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지금은 세찬 비가 차창을 스치고 있습니다.

유라이어힙(Uriah Heep)이 부르는 ‘레인(Rain)’을 무한 반복으로 들으며 달려왔기 때문인지 기분마저 날씨와 하나가 되는 것같습니다. 수다는 기분 전환에 최고라고 하셨지요? 이곳 소식을 좀 전해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축 처진 기분을 추스를 겸, 편지 한 장 띄웁니다.

독일에서 체코로

ⓒ KOKI
선생님, 저희는 지금 독일-체코 국경을 넘고 있습니다. 한때 미국과 구소련이라는 ‘빅 브라더’들의 영향으로 견고한 빗장이 걸려있던 체코. 지난 89년 벨벳혁명에 이은 자유화의 물결은 체코를 둘러싸고 있던 보이지 않는 장벽을 거둬냈고, 결국 저희가 오늘 이렇게 체코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거침없이, 그리고 자유롭게.

베를린에서 드레스덴을 지나 도착한 알텐베르크(Altenberg). E55 고속도로를 하염없이 달리면 닿게 되는 독일-체코 국경의 독일 쪽 도시입니다. 새벽 2시가 막 넘어서 그런지, 거리에는 지나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경 도시 알텐베르크는 매우 분주하기만 합니다.

왜냐고요? 체코에서 독일로 넘어가는 대형 컨테이너 트럭들 때문입니다. 인상적이게도 독일에서 체코로 넘어가는 트럭은 보이질 않는데, 체코에서 독일로 들어가는 트럭은 족히 1~2km는 됨직한 행렬을 이루고 있습니다. 체코-독일 국경에서 검사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트럭들이 만든 긴 줄로 정체 현상이 빚어지고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와 국민소득이 비슷하다는 체코. 이들도 ‘수출입국’인가 보죠?

ⓒ KOKI
바다를 접하고 있지 않아 대부분의 물류를 컨테이너 트럭과 강을 통해 해결하는 체코. 그런데 안개 속에 줄지어선 트럭 행렬보다 더 낯선 풍경이 저희들 옆을 스치고 있습니다. 체코로 들어서자마자 시작된 씁쓸한 풍경입니다.

안개가 자욱한 도로 옆에는 단층 건물들. 창문을 통해 흘러나오는 빛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바’나 ‘레스토랑’이라는 간판을 내건 것을 보니 정육점일 리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불빛만은 흔히 정육점에서나 보던 불빛에 다름 아닙니다. 형광 성분을 듬뿍 머금은 분홍 불빛. 그리고 그 불빛을 받으며 서있는 한 무리의 여성들.

독일에서 체코로 국경을 넘어서면 지금 보는 것과 같은 ‘매매춘이 가능한바’들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지난 99년 홀로 여행을 할 때에는 야간 기차를 이용했던 지라 작은 시골 마을 상황이 어떤지는 알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지금 보니 우리네 영등포역이나 용산역 인근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을, 이곳에선 국경 도로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긴 유동인구가 많은 항구나 역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매춘굴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국경 근처에 없을 수는 없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독일 쪽에는 이처럼 ‘공개적인’ 매춘굴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성을 사고파는 것에도 국가적 혹은 경제적 위계가 존재하는 모양입니다. 아니면 한쪽 정부가 의도적으로 이를 방관하고 있든지.

유유히 흐르고 있을 블타바강과 그 위에 아름답게 서있을 카를 다리, 프라하 성의 야경을 다시 한 번 보고자 택한 체코행. 야간 기차를 타지 않으니 뜻하지 않은 광경을 다 보게 됩니다. 끝 모르고 내리는 겨울비와 섬뜩하리만치 환한 형광 불빛이 이루는 앙상블. 도대체 이것은 무슨 기분인가요.

프라하에서

ⓒ KOKI
새벽 3시가 넘어서야 프라하에 도착한지라 캠핑장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일단 도시 외곽 주차장에 캠핑카를 세우고 잠을 잔 뒤, 오후 2시쯤 캠핑장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지난 99년에는 여행객들이 주로 몰리는 관광지구 안에만 머물렀기 때문이었을까요? 프라하의 분위기가 지난번과는 사뭇 다른 듯합니다.

먼저 사이렌 소리.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온갖 사이렌이 울려댑니다. 사이렌을 울리는 것도 제각각 입니다. 경찰차도 있고 소방차도 있습니다. 또 청소차 중에도 몇몇 사이렌을 울리는 것들이 보이고, 일반 승용차인 듯한 어떤 은색 자동차는 사이렌도 모자라 경광등까지 켜고 도로를 질주하더군요. 앵~앵~윙~~

ⓒ KOKI
시내 외곽의 프라하, 카를 대교 인근의 낭만적 프라하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어른들 이야기로는 우리도 한 때 사제 사이렌을 달고 다니는 자동차들이 있어 문제가 된 적 있다고 하던데. 바로 이곳이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다음으로 사람들의 시선. 그들의 싸늘한 시선이 가슴에 와 박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의 덤덤한 눈빛과는 다른, ‘저들은 누굴까?’ 혹은 ‘왜 온 거야?’ 하는 느낌. 나아가 ‘난 당신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아’ ‘당신은 여행이나 다닐 정도로 편한가 보지?’ 하는 느낌이 전해지는 눈빛.

시내에 나가려고 탔던 궤도 전차 안에서 사람을 긴장하게 하는 눈빛들과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365일 연중무휴 관광지가 되어버린 도심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그저 고된 일과를 마치고 퇴근 하는 이의 피곤함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그럴 것이라고 자위해 보지만 알 수 없는 이유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습니다.

ⓒ KOKI
그래도 구시가지로 발걸음을 옮기니 예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기 시작했습니다. 꽤 많은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이 보이는 등 골목 곳곳은 여행객들로 붐볐습니다. 암스테르담 이후 여행자들이 붐비는 겨울의 유럽 도시는 이곳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 어떤 기념품 가게 주인은 동양인이 지나가면 유창한 한국어와 일본어로 ‘뭐 도와드릴 것 없나요?’ 하고 묻기까지 합니다.

카를 다리 위는 <미션 임파서블>에서의 음습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과 멜로디를 선사하는 거리의 악사들로 꽉 채워졌습니다. 저 위로 보이는 프라하 성이 블타바강에 반사돼, 어느덧 두 개가 되어버렸네요. ‘연인이 생기면 꼭 이곳에 와서 프로포즈를 해야 한다’는 이곳 젊은이들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데 확신이 섭니다. 블타바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프라하의 야경은 그만큼 매력 덩어리입니다.

게다가 이튿날의 그윽한 아침은 며칠 전의 정육점 불빛과 차가운 시선을 잊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건 정말 오랜만에 맞이한 아침다운 아침이었습니다.

캠핑카를 세워둔 시내 외곽에서는 모락모락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고, 따스한 햇살 아래 집을 짓느라 툭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푸근한 자연의 냄새와 촉촉하게 젖은 돌길. 어렸을 적 살았던 월악산 아래 마을의 그 내음과 비슷했습니다. 여행 자원 보존을 위해 도심 개발에 제한을 두는 프라하 시당국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체코에서 오스트리아로

ⓒ KOKI
그렇게 며칠 프라하의 낭만을 즐겼습니다. 부담스럽지 않은 물가는 오랜만에 피로를 풀기에 충분할 정도의 여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다시 생기를 회복한 일행은 며칠에 걸쳐 버드와이저 맥주의 본고장 플젠(Plzeň)과 환상적인 중세마을 체스키 크루믈로프(Českỳ Krumlov)를 차례로 거쳤습니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전혀 뒤지 않는 보석 같은 곳들이었습니다. 다른 유럽과는 다른, 정감 넘치는 모습을 간직한 체코 마을들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의 체코 여행을 마치고 막 오스트리아에 들어섰습니다. 잘 닦인 도로.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흐름이 참 부드럽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운전하는 데 욕심이 없어 보입니다. ‘50km/h’ 혹은 ‘80km/h’라고 쓰여진 속도제한 표지만 나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속도에 자동차 속도를 맞추는 이곳 사람들. 해얼이 형이 운전하는 캠핑카가 중앙선을 조금 밟자 뒤따르던 차가 상향등을 켜서 경고해 주는 모습은, 철저한 속도 준수와 함께 오히려 부담스럽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칼 같이 규정을 지키고 있는 이곳 사람들. 어쩌면 이들은 먼저 갈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않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야 아둥바둥 먼저 가지 않으면,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차지하지 않으면 바로 뒤처지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와는 적잖은 부분에서 다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긴 아프면 고쳐주고 늙으면 생활비를 주는데, 무어 그리 서두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도로 위에서 느끼는 유럽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인 것 같다면, 너무 성급한 판단인가요?

ⓒ KOKI
체코-오스트리아의 오스트리아 쪽 국경 마을 바트 레온펠텐(Bad Leonfelden). 그곳에 조금 못 미처 구릉에서 보이는 석양이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체코행은 사람이 날씨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 여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날씨에 따라 기분이 요동을 쳤던 게지요. 내일은 해가 좀 나야 할 텐데….

저희는 한국 땅에 강렬한 일출을 안겨주려고 서쪽으로 또 서쪽으로 달리는 태양을 따라 서쪽에 있는 뮌헨을 향해 달릴 생각입니다. 이 해가 저희를 지나며 동쪽에서 떠오르거든 저희는 잘 있다고 생각해 주세요. 아, 이번에는 ‘Rain’처럼 우울한 노래 말고 Sting이 부르는 ‘Every Breath You Take’나 들으며 신나게 달려야겠습니다. 저 태양에 저희의 안부도 함께 실어 보내며, 기봉 드림.

ⓒ KOKI

덧붙이는 글 | 1. 더 많은 사진은 www.finlandian.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 'KOKI'는 권기봉, 박해얼, 샘, 최승희가 함께 하는 여행팀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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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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