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난 못된 여자다>(E.S. 마두로 외·번역집단 유리 옮김·도서출판 소소·2002)를 낳은 것은 '화'다. 책을 엮은 캐시 하나워는 좀 더 구체적으로 "내 삶을 덧칠했던 죄책감, 원망, 기진맥진, 순진함, 엉망진창 따위가 한패거리가 되어서 뿜어낸, 집안에서 생긴 화"라고 설명한다.
쉴새없이 울려 대는 전화기, 서평을 기다리며 쌓인 책뭉치들, 밤 늦도록 잠들지 않는 아이들, 끝없는 집안 일과 아이들 곁에 있는 것만으로 제 역할을 다 했다고 여기는 남편…. 그야말로 논스톱 특급 열차 같은 일상 속에서 하나워는 자신이 "온종일 신경질을 내며 이래라 저래라 짖어대며 펄떡이는 한 마리 개" 같았다고 말한다.
그에게 유일한 출구는 온라인에서나마 만날 수 있는 여자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집안의 암캐'가 되어가는 자신에게, 자신을 화나게 하는 가족들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하나워는 자신들의 분노가 어떤 분명한 원천을 가지고 있으며, 그 분노를 공유하는 것이 화를 푸는 방법 중 한가지임을 깨달았다.
스물여섯명의 입심 좋은 여자들이 분노를 화두로 풀어낸 이야기를 묶은 이 책은 그리하여 만들어졌다. 책장을 여는 순간 동거, 섹스, 결혼, 일과 가정, 모성애를 주제로 그들의 현란한 분노가 펼쳐지는 것이다.
책장을 열면 그녀들의 분노가 펼쳐진다
한 여자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아 '아빠와는 가장 거리가 먼' 남자를 만났지만 실제로는 남자가 아버지와 별반 다르지 않고, 자신은 점점 엄마를 닮아간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끊임없이 성질을 부리며 가사를 도맡는 심리 밑바닥에는 훌륭한 엄마라는 자부심이 어쩔 수 없이 깔려 있다. 완벽한 한쌍을 이루는 두가지 감정, 분노와 자부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되는 것이다.
결혼과 동시에 말라붙는 에로티시즘을 고민하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사랑 없는 섹스의 황홀함과 역겨움에 넌더리치며 한 남자에 정착하고 싶어하는 여자도 있다. 십계명을 어기고 "이웃 집의 남자를 탐"한 데다 그의 아이까지 낳은 용감한 여자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어리석은 다짐 대신 "지금은 누군가와 부도덕한 관계를 가질 만한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
| | 글쓴이와 옮긴이 소개 | | | | ·캐시 하나워(Cathi Hanauer)-소설 <언니의 육체>의 작가. <엘르>, <마드모아젤> 등의 잡지에 에세이와 소설, 비평 등을 발표하고 있다. 잡지 <세븐틴>에서는 인간 관계에 관한 충고를 담은 칼럼을 맡고 있다.
·번역집단 유리-번역 작업이란 유리를 통해 원작을 들여다보듯 해야 한다는 스승의 지론에 따라 '유리'라는 이름을 정했다.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번역학과 출신의 여성 여섯명으로 구성되어 "가슴 밑바닥을 긁어내고 숨소리까지 전달하는 완벽한 번역"을 꿈꾸는 번역집단. | | | | | |
벽난로가 놓인 빅토리아 풍 저택에서 소설을 쓰고, 밤에는 '꿈의 남편'과 뜨거운 섹스를 나누리라는 환상과는 달리 "브루클린의 공장 지역에서 날마다 시끄러운 트럭 소리에 시달리며 배관 파이프가 그대로 드러난 천장 밑에서 괴팍한 남편"과 함께 살고있는 여자, 마흔여섯이 되어서야 결혼함으로써 "쟤한테 무슨 문제있어? 왜 짝을 못찾는 거야?"는 친척들의 수군거림에서 벗어난 여자, 사각 팬티 차림으로 발톱을 깎는 남자를 보며 "내가 고르고 골라 선택한 남자가 이 사람 맞아?"라고 중얼거리는 여자들은 결혼이 사랑의 완성인지 아니면 무덤인지 알아내느라 고심 중이다.
일과 가정 사이에 샌드위치 햄처럼 끼여 차라리 이혼을 하고 공동 육아권을 가지는 게 낫겠다고 비명을 지르는 여자도 있다. 아이에게 '고양이 새끼 분양'이라고 적힌 목걸이를 걸어 길가에 내다 놓을까 말까를 고민하는 여자는 '모성애란 여성의 본능'이란 고루한 구호를 단번에 무너뜨린다.
"그래, 난 못된 여자다!"
이 책은 여성들의 화에 대한 한편의 보고서다. 책을 쓴 여자들은 자신들이 왜 화가 나는지, 어떻게 성질을 부려 가족을 질리게 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괴롭히는지 털어놓는다. 그 보고서를 뒷받침하는 것은 솔직하게 드러낸 그들 자신의 삶과 분노이다. 그 솔직함은 어떤 객관적인 수치나 이론보다 더 타당하고 강력한 근거이다.
그들은 때론 중얼거리고 때론 말하고 때론 비명을 내지르면서 선언한다.
"그래, 난 못된 여자다!"
들어가는 말의 끝머리에 캐시 하나워가 쓴 다음과 같은 말은 이들의 선언을 역시 자세히 설명해 준다.
"이 책의 많은 필자들처럼 나는 완벽주의자이며 스케줄이 너무 빡빡한 불만분자이며, 지상에서의 내 짧은 생애 동안 거두어들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욕심 많은 여자다. 만약 이것이 내가 결코 '집안의 천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면, 그저 가족이 날 용서해 주길 바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