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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림의 바위 숲의 모습
석림의 바위 숲의 모습 ⓒ 최성수
여강에서 오전 열 시 반에 출발한 버스는 오후 여덟 시 사십분이 되어서야 곤명에 도착합니다. 꼬박 열 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열 시간의 버스 여행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두고 가는 여강 고성의 아름다움이 아쉬워서 마음은 온통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곤명으로 돌아오는 내내 하루 종일 버스 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만 바라보았습니다. 한 십 년쯤 그런 자세로 있었을 것 같은 소수민족 아주머니가 집 앞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과 느릿느릿 밭을 둘러보는 농부, 혹은 노오란 유채밭에 서서 지나가는 우리를 그저 아무 생각 없는 것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너무 바쁘게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간에 좇기고, 그 시간을 상품으로 팔아먹으며 살아온 것이 우리 자본주의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은 내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부겐베리아 핀 어느 집 입구. 여행 내내 부겐베리아는 아름다움이었고, 여행이 끝나고는 그리움이다.
부겐베리아 핀 어느 집 입구. 여행 내내 부겐베리아는 아름다움이었고, 여행이 끝나고는 그리움이다. ⓒ 최성수
곤명 시내에 내리니 다시 온갖 종류의 차들과 복잡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다가옵니다. 여행의 첫날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입니다. 자동차와 사람들을 피해 겨우겨우 미리 계획해 둔 호텔로 찾아갑니다. 삼원빈관(三元賓館)이 그곳입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인터넷을 뒤지다 찾은 그 호텔의 평이 비교적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 보니 기대와는 영 딴판입니다. 우선 우리 같은 배낭 여행자들은 탐탁지 않다는 듯, 카운터의 아가씨는 퉁명스럽기 그지없습니다. 4인실을 물어보니 두 말 않고 “메이요(沒有)”입니다. 4인실의 1인당 가격은 30원, 싼 방이라 없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3인실도 “메이요”입니다. 2인실로 가란 말인데, 아가씨는 우리 행색을 보아하니 2인실에 묵을 것 같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물어보는 말에 아예 대꾸조차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운삼평에서 춤추는 소수민족 아가씨들
운삼평에서 춤추는 소수민족 아가씨들 ⓒ 최성수
물어보면 한 마디 하다가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고, 다른 사람이 찾아오면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하느라 우리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화가 난 송희가 아가씨의 태도를 나무라자 눈을 치뜨고 내리뜨며 오히려 적반하장입니다.

화가 난 우리가 아가씨에게 야단을 치고, 도대체 서비스 정신이 없다고 투덜대며 그곳의 잠자리를 포기하고 나와 버립니다. 그리고 몇 군데 호텔을 찾아봤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거나 아니면 외국인은 묵을 수 없다는 대답만 듣고 맙니다.

늦은 시간, 한 시간 가까이 헤매다 겨우 마음에 드는 호텔을 한 곳 찾아 들어섭니다. 4인실은 없다며, 대신 2인실을 80원에 해주겠다는 그 호텔은 통해빈관(通海賓館)입니다. 돈이나 시설이 문제가 아니라, 카운터를 보는 몸피 가늘고 키 작은 아가씨의 친절 때문에 그 호텔에 묵기로 합니다.

늦게 든 잠치고는 일찍 일어나 우리는 길을 나섭니다. 석림(石林)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거리에 나서자 온통 사람들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모두들 바삐 어딘가로 가고 있는 모습은 여강이나 대리의 사람들과 전혀 달라 보입니다.

부겐베리아는 운남의 상징이다.
부겐베리아는 운남의 상징이다. ⓒ 최성수
조금 걷자 여러 명의 아주머니들이 우리에게 다가섭니다. “스린, 스린”하며 그들은 속삭이듯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석림에 가자는 말입니다.

“석림 입장료가 80원이다. 내가 왕복 교통편에 입장료까지 70원에 해 주겠다.”

그 제안에 우리는 한 아주머니가 이끄는 대로 따라 나섭니다. 길을 건너고 골목을 돌아 아주머니가 우리를 안내한 곳에는 그러나 버스가 한 대도 없습니다.

“여기서 기다리면 버스가 올 거야.”

아주머니는 태연하게 그런 말을 합니다. 알고 보니 아주머니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아무 버스나 석림행을 태워주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어이없어 하는데, 덩치가 커다랗고 검은 얼굴을 한 청년이 지나가면서 “한국 분이세요?” 하고 인사를 합니다. 우리도 얼떨결에 “예, 안녕하세요.”하고 고개를 숙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 사라졌던 그 청년이 다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석림 가실 거면 우리와 함께 가시죠?”

우리가 그 청년을 따라 가자 우리를 끌고 온 아주머니도 따라옵니다. 우리가 간 곳에는 승합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는데, 중국인 여성 두 명과 아까 청년과 함께 가던 우리나라 사람 둘이 타고 있습니다. 우리 넷이 타자 모두 아홉 명입니다.

여강 흑룡담 공원. 설산이 비친 연못 물이 눈부시다.
여강 흑룡담 공원. 설산이 비친 연못 물이 눈부시다. ⓒ 최성수
우리를 따라 온 아주머니는 자꾸 일인당 차비 20원을 내라고 합니다. 자기와 관련도 없는 승합차의 차비를 받아 챙길 셈입니다. 알고 보니 이 승합차는 중국 여러 곳을 여행 중인 여성 두 명을 위해 나온 차입니다. 두 명을 태우고 석림에 가느니 다른 사람을 더 태워서 가이드가 차비라도 가욋돈을 챙기기 위해 우리를 태운 것입니다.

석림의 기묘한 돌 모습
석림의 기묘한 돌 모습 ⓒ 최성수
우리에게 말을 붙였던 젊은 친구의 이름은 윤이한입니다. 그 하루 석림 여행에서 우리는 윤이한씨 때문에 즐거웠습니다. 석림에 도착하자 그 친구는 면허증을 꺼내놓습니다.

“인터넷에 보니까 우리나라 운전면허증을 학생증으로 쓸 수 있대요. 내가 학생표를 끊으면 남는 돈으로 과일을 쏘겠습니다.”

그는 태연히 운전면허증을 내놓고, 되느니 안 되느니 실랑이를 하더니 기어코 학생표를 끊습니다.

석림은 약 2억 년 전에 바다가 융기하면서 생긴 돌숲입니다. 대석림과 소석림이라는 이름으로 공개되는 현재의 석림은 전체의 약 5% 정도라고 하지만,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돌숲입니다.

하지만 상상했던 만큼 거대한 돌숲은 아닙니다. 기기묘묘하고 아기자기한 돌들이 갖가지 형상으로 솟아있는 공원이라고 하면 적당한 표현이 될까요? 그저 바위의 기묘함에 감탄을 하다 깔끔하고 정갈하게 구성된 공원의 아름다움을 맛보는 곳이 석림입니다.

우리의 일행은 모두 아홉, 중국인 두 여성은 대학 교수라고 합니다. 전자 계통을 전공하는 그들은 왕중하(王中霞 )와 장염(張焱)입니다. 환한 웃음이 고운 두 여성은 방학을 맞아 중국 여러 곳을 여행 중이라고 합니다.

석림의 코끼리 바위. 계림 상비산 코끼리의 새끼라고...
석림의 코끼리 바위. 계림 상비산 코끼리의 새끼라고... ⓒ 최성수
우리나라 사람인 김승민씨는 대학생입니다. 다니던 학교를 휴학하고 일 년 남짓 상해에서 유학을 했다는 그는 전공이 경영정보학이랍니다. 겨우 일 년 유학한 것치고는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하고, 남의 말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그는 진솔한 청년입니다. 여행을 다니면서 만나는 유학생 중에는 이름만 유학생이지 중국어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승민씨는 자신의 젊음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젊은이입니다.

그리고 또 한 명 기억할 만한 친구는 바로 운전 면허증을 학생증이라고 내놓던 윤이한씨입니다.

“열 아홉 살 때부터의 제 꿈이 중국 배낭여행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하던 PC방을 정리하고 배낭여행을 나섰답니다. 서른 두 살이니 십 년이 넘는 동안 그 꿈을 키워온 셈입니다. 천진, 북경을 거쳐 중국 곳곳을 돌아다니고 대리와 여강을 거쳐 곤명에 온 그는 앞으로도 중경, 황산, 장강삼협, 항주, 소주, 상해를 거쳐 청도로 여행을 계속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여행을 하는 것을 보니 중국어를 아주 잘 하나보다고 묻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중국어요? 몇 마디 못해요. 영어도 그렇고요. 그래도 여행하는 데 별 지장이 없던데요.”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겪었던 여행담을 구수하게 들려줍니다. 한번은 호텔 4인실에 들어갔는데, 중국어를 잘 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가 가장 싼 값에 묵었답니다. 카운터 보는 아가씨가 방 값을 부르는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답니다. 그랬더니 가격이 점점 내려가 30원이 되었답니다. 그쯤이면 비싼 가격이 아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는데, 방에 들어가 보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40원을 주었다는 겁니다. 말도 없이 고개만 가로저었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오며, 한편으로는 그런 당당함이야말로 어떤 외국어 능력보다도 여행의 가장 유효한 무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석림의 바위는 웅장하기보다 아기자기하다.
석림의 바위는 웅장하기보다 아기자기하다. ⓒ 최성수
우리가 여강을 갔다 왔다고 하자, 그는 그곳에서의 경험담도 들려줍니다.

“여강 가는 버스가 고장이 나서 예정보다 네 시간이나 늦은 한밤중에 도착했어요. 호텔도 다 닫고, 갈 데가 없어서 여강 고성 입구 물레방아 있는 곳에서 노점하는 아주머니와 손짓발짓으로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러다 가이드북에서 흑룡담 공원에 7시 이전에 가면 무료라고 한 것이 기억나서 갔더니, 글쎄 문이 닫혀있지 뭐예요. 그래서 담을 넘어가다가 경비한테 걸렸어요. 경비가 뭐라고 그러며 나를 끌고 정문으로 가는데, 알고 보니 입장료 내고 들어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와버렸어요.

호도협 트래킹도 끔찍했어요. 어떤 책에 보니 트래킹을 하다가 지나가는 택시나 버스를 타고 내려오면 된다고 해서 갔는데, 아무리 가도 차는 없고, 비는 줄줄 내리지, 내가 아는 우리나라 노래는 안 부른 게 없다니까요. 울고 넘는 박달재는 한 다섯 번 불렀을 걸요.”

그런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은 고생을 즐거움으로 바꾸어 칠 줄 아는 여유가 가득합니다.

석림에 돌숲을 보러 갔다가 돌숲의 기묘함보다는 사람을 만나는 재미를 만끽한 셈입니다. 배낭여행은 온갖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 상황을 즐기고, 그것을 경험삼아 자신의 내면을 한번더 돌아보게 되는 것이 배낭여행의 참 맛이겠지요. 석림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그런 배낭여행의 즐거움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 것 같아 바라보는 저의 마음도 푸근해 집니다.

석림에서 만난 사람들.
석림에서 만난 사람들. ⓒ 최성수
저녁, 석림에 갔던 일행들과 식사를 하고, 기약도 없는 작별을 합니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헤어짐은 뒷기약이 없어 더 쓸쓸한 지도 모릅니다. 오늘이 여행의 마지막 밤이어서 더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마지막 밤을 기념하기 위해 거리에 나가 온갖 과일들을 삽니다. 케이크도 하나 삽니다. 어디선가 본 곤명에 가면 케이크를 먹어보라고 한 글이 떠올라서입니다. 정말 그 글 대로 곤명의 케이크는 맛이 좋습니다.

화룡과(火龍果)는 겉껍질이 붉은 색에 불이 타오르는 것 같은 무늬의 과일입니다. 그러나 그 맛은 겉보기와 달리 심심하기만 합니다. 계란과(鷄蛋果)는 껍질을 벗기니 계란 노른자 모양의 속이 나옵니다. 맛도 계란 노른자와 비슷합니다. 인생과(人生果)는 밍밍하면서 씨가 아주 많습니다. 우리는 인생과를 먹으며 인생이란 정말 이 과일처럼 곳곳에 씨가 많아서 고통스럽기까지 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며 웃었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인생에 이렇게 짧은 기간이나마 서로 만나 여행을 하는 재미를 나누었으니, 그 인연 또한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 밤, 나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하고 뒤척여야 했습니다. 여행은 자신의 삶의 공간을 떠나는 일이고, 또 그 떠난 공간에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영원히 여행자로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우리의 생 또한 무한한 우주적 시간 속에서 보면 한갓 여행의 짧은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석림 공원 안의 대숲과 매화. 바람 소리가 시원하고 상큼하다.
석림 공원 안의 대숲과 매화. 바람 소리가 시원하고 상큼하다. ⓒ 최성수
그래서 이백은 그의 글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서 “무릇 이 세상은 모든 사물의 여관이고, 세월은 여러 나날을 지나가는 나그네로다. 허망한 인생은 꿈과 같으니, 짧은 인생에 즐거움이 얼마나 되겠는가.(夫天地者, 萬物之逆旅, 光陰者, 百代之過客. 浮生若夢, 爲歡幾何)”라며 생의 짧고 허망함과 시간과 세상의 무한함을 이야기한 것이겠지요.

여행 내내 내 등과 함께 했던 짐을 꾸리며, 이제 다시 일상의 틀 속으로 돌아가는 마음의 준비를 합니다. 아마 나는 앞으로 남은 내 생의 굽이길이면 늘 이번 여행의 기억을 떠올릴 지도 모릅니다.

초록불인데도 절대 비켜주지 않고 마구 달리던 곤명의 차들과, 그런 차들을 보며 “발이 밟힐까봐 겁난다”고 웃던 일들과, 얼하이의 그 끝없이 푸른 물결과, 여강 고성의 어느 밤, 내 잠을 딛고 지나가던 새벽 손수레와 여강 사람들의 발소리, 루구호의 눈부신 햇살과 별빛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번 여행길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북한을 탈출해 운남을 떠돌던 청년과(나는 그 친구의 이야기를 한 회쯤 쓸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내 글이 그 친구의 살아갈 길에 문제로 남을 가능성이 눈꼽만치라도 있을 듯싶어 그만두었습니다.), 곤명에서 만난 윤이한씨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여강을 안내해 주었던 나시족 기사와, 루구호에서 만난 모수족 아가씨의 쓸쓸한 표정도 늘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번 여행을 함께 했던 제자 정희와 그의 동생들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내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륙하는 밤 비행기에서 바라보는 곤명의 불빛은 물기에 젖어 있는 것처럼 눅눅해 보였습니다. 내 마음이 젖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요. 그 불빛 속에서 나는 운남의 희디흰 구름과 푸르디푸른 하늘과, 쨍쨍한 햇살, 선선하고 상쾌한 바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곤명에 대한 기억이 어느새 내 마음 속에 그리움으로 바뀐 때문일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 그동안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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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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