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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국민 소환제를 채택하고 있지 않다. 선거권자의 폭발적인 증가와 모든 국정 사안을 고려할 만큼 모든 국민의 정치적 소양이 깊지 못하다는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가 반영된 법 현실이다. 거기에 거대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인하여 언제든 국민적 여론이 특정 권력과 이해집단에 의해서 굴절될 수 있다는 현실적 이유까지 감안하면 국민소환제를 채택하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사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였다.

더구나 잊혀진 역사에서가 아닌 불과 수년 전까지 무소불위 독재적 대통령 권한의 전횡을 막지 못하던 무능한 국회 권력을 기억하고 있는 국민감정으로 볼 때 의회의 권능을 통제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너무나 당연한 소치였다.

하지만, 국회의 권능 또한 민주공화국 내의 3권 분립 정신에 입각할 때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만큼이나 강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아픈 과거로 말미암아 너무 쉽게 잊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국회는 늘 대통령의 한 마디면 몸을 낮추거나 감추었고, 그 어떤 불의를 보아도 자신들의 살 궁리만 하기 급급한 무력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랬던 국회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모 아니면 도'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식의 막가파 정치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누이가 좋아야 매부도 좋은 것이라는 현실적 이익 계산의 미명하에 감추어 두었던 불법 정치자금의 비리들이 속속 드러나 설자리가 없어지면서 그들의 생존 방식은 치열해지다 못해 악랄해져서 결국 대통령 탄핵이라는 최후 카드까지 꺼내들었다.

이승만씨의 3선개헌 때도, 박정희씨의 군사 쿠데타 때도, 전두환씨의 5.18 광주 학살 때도, 노태우씨의 몇 천억 비자금 수수 때도, 김영삼씨의 IMF 때도 말 한 마디 못하고 숨죽여 지냈던 그들이 대통령의 기자회견 답변 한 마디에 갑자기 세상의 정의감은 모두 자기 것이었던 양 살기 등등하게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다. 이 땅의 정의와 민주주의는 모두 자신들이 보호해야 하는 사명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어떻게 이해를 해주어야 하나.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나. 그저 이 땅에 태어난 게 죄 같기만 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아무도 보살펴 주지 않는 경제 불황에 덮친 3월의 폭설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해 있다가 그들의 얼토당토하지 않은 기행(奇行)에 손발에 남아 있던 힘마저 풀어질 뿐이다.

자신들의 잘못은 뉘우치지 못하고, 자신들이 국회의사당의 마이크를 잡고 사실 검증도 되지 않은 말들로 다른 사람들의 인격과 존엄에 파랗게 날세운 단도로 헤집어 놓을 때는 언제고, 대통령의 답변 한 마디에 모두 유탄을 맞은 상이병이 되어, 국민들의 근근한 주머니에서 핸드폰 요금과, 자동차값과, 아파트값의 이름으로 기업들에 지불한 돈을 차떼기로 털어 간 자신들의 잘못은 하나 뉘우치지 못하고, 아니 모두 새까맣게 잊고 저렇게 정신나간 승냥이가 되어서 나라를 모두 뒤집어놓고 있으니.

이제 국민이 나서야 할 때다. 이제는 흔해져버린 촛불로도 저들의 두터운 무감각증을 깨기는 역부족인 듯 하다. 그들은 여전히 국회의 두터운 벽 안에 모여 앉아서 국민의 절망감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바라보며 국민들이 얼마나 분노하는지, 아니 이젠 분노할 감정도 남아 있지 않고, 그저 얼마나 안타깝게 절망만 하고 있는지 다같이 모여서 함성이라도 질러 주어야 한다.

그 함성소리는 단순히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적인 의회 기능에 대한 통제수단으로 제도권으로 안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유일한 국민들의 의회통제 수단인 국민소환제가 하루속히 도입되어야 한다.

국민들의 정치참여에 대한 열망도 커지고 있고 그에 따른 정치적 소양도 깊어지고 있다. 언제든 또 다시 비상 시국이 발생했을 때 탄핵해야 할 것들을 탄핵하지 못하는 절망감을 맛볼 수는 없다. 민주국가의 모든 힘은 결국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국민들보다 정치적 소양이 모자라 보이는 국회의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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