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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14일은 곤욕의 날이다.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 빼빼로 데이 등 속칭 ‘솔로부대’들뿐만 아니라 연인들도 곤욕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사랑 혹은 우정을 확인해주는 날이지만 상업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남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다. 내 여자친구의 친구들에게서 십 만원이 넘는 선물을 받았다는 둥 멋들어진 휴양지를 다녀왔다는 둥 하는 소리를 들을 때면 여자친구 앞에서 무던해지려고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오늘도 마찬가지. 서울 시내에서 사람만큼이나 많은 꽃바구니들이 판치는 화이트 데이다. 내가 가입해서 활동하는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들도 어떤 선물이 좋은지를 두고 남성들의 토론이 한창이다. 며칠 사이 나 역시 토론에 참가해서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구박 받기 일쑤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근사하거나 이쁜 것이 아니라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난 꾸준히 그들에게 화이트 데이를 맞이해 추천하고 있다. 바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다.

이 책은 두껍다. 인스턴트 음식 먹는 요량으로 보려고 했다가는 책의 분량에 체할 지도 모른다. 책 내용도 마찬가지. 요즘 유행하는 신데렐라 이야기나 센세이션한 스토리 전개는 없다. 책 안에는 고전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분위기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2004년 대한민국의 연인들에게 추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등장인물은 세익스피어 희극처럼 나름의 상징성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등장인물이자 주인공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엘리자베스와 다르시. <오만과 편견>은 이들의 사랑이야기가 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책 제목인 ‘오만’과 ‘편견’이라는 단어를 엘리자베스가 ‘편견’, 다르시가 ‘오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쯤 되면 사랑을 겪어 본 사람들은 왜 이 책을 추천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만과 편견>은 세계고전문학으로 손꼽히는 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연예심리소설로도 고전이라고 부를 만하다. 언니의 연애를 하는데 자부심을 갖고 조언을 하는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꽤나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본래 자신의 결점을 발견하지는 못하는 법, 그는 자신을 사모하는 다르시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지독한 편견으로 그를 냉대한다. 다르시 또한 가문과 콧대 높은 자존심 때문에 좋아하면서도 말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치듯 혼자서 끙끙거린다.

마치 순정 만화의 주인공처럼 말도 안 되는 핑계거리를 만들며 엘리자베스를 만나기 위해 서성거리는 다르시의 모습은 안쓰러움을 넘어 많은 남성들의 동감을 얻어낼 만하다. 얼마나 많은 남성들이 사모하는 마음을 제대로 털어놓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가? <오만과 편견>을 보는 여성들도 또한 공감할 것이다. 남의 연애에는 천부적인 기질을 발휘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는 여성의 심리는 시대나 장소와 별 차이가 없다.

<오만과 편견>은 주지했다시피 세계고전문학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그런 탓에 사랑을 둘러싼 이들의 심리전뿐만 아니라 각각 상징성을 갖고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펴보는 재미나 무도회로 상징되는 영국 특유의 분위기를 만끽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비록 요즘 드라마 내용처럼 ‘황홀한’ 내용전개는 없지만 충분히 경험했을 법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만과 편견>은 굳이 화이트 데이뿐만 아니라 언제라도 연인이 함께 읽어볼 수 있는 책이다. 자신과 자신의 연인 사이에 ‘오만’과 ‘편견’이라는 단어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차분하게 감정을 풀어 나가는 기회로 삼아 볼 수 있다.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지음, 민음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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