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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근대적인 고적조사보고의 효시로 일컫는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의 <한국건축조사보고>이다. 원래 그의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902년 여름이었지만, 보고서의 간행은 1904년 7월에 이루어졌다. 이로써 세키노는 조선미술사의 연구를 '선점'하였다.
흔히 근대적인 고적조사보고의 효시로 일컫는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의 <한국건축조사보고>이다. 원래 그의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902년 여름이었지만, 보고서의 간행은 1904년 7월에 이루어졌다. 이로써 세키노는 조선미술사의 연구를 '선점'하였다.
35세의 청년학자였던 그가 동경제대 조교수의 신분으로 이 땅에 처음 건너온 것은 1902년 여름이었다. 그 해 7월 5일 인천에 상륙하여 9월 4일 부산을 떠날 때까지 62일간에 걸쳐 서울, 개성, 부산, 경주, 해인사 등지의 고건축과 유물들을 살펴보았고, 그 후 1년 반 가량의 정리작업을 거쳐 1904년 7월에 정식으로 출간한 것이 이 보고서였다.

말하자면 조선의 문화예술에 대한 체계적인 자료수집은 그때부터 벌써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조선미술사 연구의 첫머리를 장식한 그의 보고서를 뒤져보면, 조선건축에 대한 평가가 가히 오류와 편견과 폄하 일색이었다.

가령 '졸악(拙惡)'하다거나 '조졸(粗拙)'하다거나 '졸렬(拙劣)'하다거나 하는 구절이 예사로 등장하고, 그 말미에는 '볼 것이 없다'는 표현이 뒤따르기 일쑤였다. 그나마 경주의 봉덕사종, 태종무열왕릉비, 원각사탑, 원각사비, 불국사 다보탑, 경천사 석탑, 경복궁 광화문, 창덕궁 승화루 등은 좀 볼만하다고 적어놓은 것이 그가 보낸 찬사의 전부였다.

그리고 "(조선에는) 양질의 목재가 없는 탓에 기공이 정련하지 못하고 조잡에 빠지기 쉬워 저 궁전, 사당, 사찰과 같이 중요한 건축에는 반드시 색채(즉 단청)를 더하여 소목조(素木造)로 두지 않는 것은 다소간 이것과 관계없다고 말할 수 없다"고 표현한 데서도 조선건축에 대한 삐딱한 인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수천 년을 내려온 조선의 건축역사를 일컬어, 그것도 단 두달 가량의 조사만으로 섣불리 '보잘것없다'는 식의 표현을 쓴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대담한 일이라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의 평가가 어쨌건 간에 <한국건축조사보고>는 애당초 그다지 세련되었다거나 깊이 있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적지 않았다.

세키노 자신이 털어놓고 있듯이, "짧은 일정에 쫓겨, 때로는 폭우 때문에 방해를 받아" 여기저기 거죽이나 훑어본 정도였고, 또한 조사지역도 경상도와 경기도 쪽에 편중되어 있었던 탓에 조선 건축물의 진수를 다 보았다고 하기는 어려웠던 처지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신라의 도읍 경주에서 피폐한 불국사의 모습은 보았을지라도 바로 옆에 있던 석굴암의 존재는 전혀 알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세키노의 한국건축조사와 관련하여 1902년 7월 17일에 발급된 호조(護照) 즉 여행증명서(오른쪽)와 그 전날 한국외부에서 작성한 '훈령 제19호'(왼쪽)이다. 당초 그의 경유지역에는 부여와 은진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촉박한 일정과 기후 탓에 결국 조사는 이뤄지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건축조사보고>에는 백제시대에 관한 부분은 완전히 누락되어 있다.
세키노의 한국건축조사와 관련하여 1902년 7월 17일에 발급된 호조(護照) 즉 여행증명서(오른쪽)와 그 전날 한국외부에서 작성한 '훈령 제19호'(왼쪽)이다. 당초 그의 경유지역에는 부여와 은진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촉박한 일정과 기후 탓에 결국 조사는 이뤄지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건축조사보고>에는 백제시대에 관한 부분은 완전히 누락되어 있다. ⓒ 김정동
그러한 그가 미처 세밀한 조사분석이나 나름의 안목을 가지기는 어려웠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그러니까 보고서의 저변에 깔린 역사인식과 서술방식이란 것이 대개 하야시 타이스케(林泰輔), 기쿠치 켄죠(菊池謙讓), 시노부 준페이(信部淳平), 시데하라 타이라(幣原坦) 등의 그것을 그대로 차용한 흔적이 역력하다.

보고서의 군데군데, 상세한 것은 다른 날로 미룬다든지 아니면 다른 것들은 생략한다든지 하는 구절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사정이 반영된 탓이었다. 실제로 그가 보고서의 첫머리에 "이번의 조사는 급속(急速)에만 집중한 탓에 일일이 건조물에 대한 실측과 상세한 사생도(寫生圖)를 그릴 틈이 없어 부득이 전부 사진에 맡기는 바 되었다"고 적어놓은 것으로 봐도 그러하다.

그런데 이토록 성급한 건축조사는 도대체 어떠한 연유로 이루어졌던 것일까? 이에 관해 자세한 내막까지 알려진 바는 없으나, 세키노의 보고서에는 그 개략이나마 짐작할 만한 구절이 하나 들어 있다.

"나는 다행히 관명(官命)을 받아 한국건축조사를 위해 그곳에 건너가서 오로지 이 점에 주목하여 연구에 몰두하였으나… (중략)… 처음 내가 출발할 제에 다츠노 킨고(辰野金吾) 공과대학 학장은 특히 명령하기에 한국건축의 사적연구를 하고, 또 이르기를 가급적 넓게 관찰하며 얕은 것에 구애되지 말라고 하여 나는 이 명을 깊이 새기고…."

세키노 타다시와 관련된 몇 가지 사진자료들이다. 왼쪽부터 세키노 타다시의 모습, 홍제동오층석탑을 조사하는 모습, 그리고 세키노박사영사비(關野博士永思碑)이다. 그가 생전에 낙랑지역고분의 발굴조사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지녔던 탓에 그의 사후 그것을 기려 평남 대동군 대동강면 토성리에 기념비석이 세워졌다.
세키노 타다시와 관련된 몇 가지 사진자료들이다. 왼쪽부터 세키노 타다시의 모습, 홍제동오층석탑을 조사하는 모습, 그리고 세키노박사영사비(關野博士永思碑)이다. 그가 생전에 낙랑지역고분의 발굴조사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지녔던 탓에 그의 사후 그것을 기려 평남 대동군 대동강면 토성리에 기념비석이 세워졌다.
말하자면 세키노의 한국탐방은 일본과의 문화관계 및 동양의 건축사에 유념하여 그 깊이는 없어도 좋으니 우선 이 땅에 흩어진 건축관련 유물의 개괄적인 현황부터 두루 조사하겠다는 것에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그저 '관명'이라고만 적어놓았으니, 그 주체가 누구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다만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 그의 사망에 즈음하여 <건축잡지> 1935년 11월호에 정리된 연보에 따르면, 그가 한국에 차견(差遣)된 것이 내각의 명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니까 그의 한국건축조사는 일본정부 차원에서 시도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건축조사보고>의 발표는 그 자체로 즉각적인 부작용을 불러왔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07년 일본의 궁내대신 타나카 미츠아키(田中光顯)가 한국황태자의 가례식에 특파대사로 왔을 제에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라는 골동상을 시켜 경기도 개풍군에 있던 경천사 석탑을 일본으로 무단 반출했던 것도, 그리고 경주 불국사에 멀쩡하게 잘 있던 사리탑 하나가 1906년 5월에 일본 우에노 정양헌(精養軒)으로 옮겨진 것도 모두 세키노의 보고서에 그 단초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세키노는 불국사 사리탑의 무단반출과 관련하여 <미술연구> 1933년 7월호에 이러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 후 1904년 내가 동경제국대학 공학부의 보고로서 <한국건축조사보고>를 공개하여, 그 가운데 이 불국사에 있어서 신라시대의 유물을 처음으로 세간에 소개하였다. 그리고 그 책 하나를 당시 개성에 거주하던 모씨(지금은 고인)에게 증정했다. 이것은 내가 개성에 탐방하던 때에 이 사람의 원조에 신세를 진 바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06년 이 사람은 이 불국사 유물 가운데, 사리석탑을 절의 승려에게서 구입하여 이를 동경으로 가져왔고, 우에노 정양헌의 앞뜰에 진열하여 일반유지자들에게 관람을 하게 했던 것이다. 당시 잡지 <국화>에 그 사진을 수록하기도 했고, 나는 국화사의 의뢰로 그 해설을 썼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드물게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그네들 스스로의 손으로 반환이 이루어진 유물들의 면면이다. 차례대로 경천사 십층석탑, 불국사 사리탑,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이다. 이 가운데 경천사 석탑과 불국사 사리탑은 세키노의 <한국건축조사보고>가 무단반출의 직접적인 빌미가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드물게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그네들 스스로의 손으로 반환이 이루어진 유물들의 면면이다. 차례대로 경천사 십층석탑, 불국사 사리탑,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이다. 이 가운데 경천사 석탑과 불국사 사리탑은 세키노의 <한국건축조사보고>가 무단반출의 직접적인 빌미가 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경천사 석탑이나 불국사 사리탑은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식민통치가 이어지는 동안에 그네들 스스로의 손으로 조선 땅에 반환되긴 했지만, 애당초 그 존재를 세세하게 알려주었던 <한국건축조사보고>가 해당유물의 무단반출을 부추기는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이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세키노는 자신의 조수였던 야츠이 세이이치(谷井濟一)와 쿠리야마 순이치(栗山俊一)를 데리고 1909년에 통감부의 승인을 거쳐 한국탁지부의 촉탁이 되어 고건축조사를 재개하였고, 다시 1910년 이후 1912년에 이르는 시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촉탁이 되어 해마다 전국적인 고적조사사업을 지속했던 탓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조사목록이 불어나면 불어날수록 필시 일본인 골동상들의 먹이감 역시 그만큼 늘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에는 조선총독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실제로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의 야외전시구역을 장식할 목적으로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으로 옮겨놓은 개성의 남계원칠층석탑이나 충주의 홍법국사실상탑, 원주지역의 석불과 철불, 그리고 보제존자사리탑과 같은 숱한 유물들은 한결같이 세키노의 조사목록에 이미 포함되어 있던 것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조선고적도보>라는 사진첩 또한 세키노의 고적조사에 따른 부산물이었다. 세키노가 <한국건축조사보고>에 발표한 사진자료가 280여장에 달하고, 그 후 <조선고적조사약보고> 등에 제출한 유리원판자료를 모두 합하면 그 숫자가 거의 2천여 장에 달하고 있으니 그것들이 방대한 <조선고적도보>의 편찬을 위한 든든한 밑천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세키노가 1902년에 촬영한 경복궁 광화문의 모습이다. 그는 <한국건축조사보고>에서 조선의 건축이 졸렬하다거나 볼 것이 없다거나 하는 말투로 일관하였으나, 이 광화문에 대해서는 "경복궁 내에 몇 백의 건축 가운데 최걸작"이라는 찬사를 덧붙여 두었다.
세키노가 1902년에 촬영한 경복궁 광화문의 모습이다. 그는 <한국건축조사보고>에서 조선의 건축이 졸렬하다거나 볼 것이 없다거나 하는 말투로 일관하였으나, 이 광화문에 대해서는 "경복궁 내에 몇 백의 건축 가운데 최걸작"이라는 찬사를 덧붙여 두었다.
우연하게도 세키노의 <한국건축조사보고>에 채록된 청계천 광교의 석물이다. 원래 이것은 '정릉(貞陵)'의 석물이었던 것인데, 세키노는 이 사실을 몰랐던지 "예전에 혹 절간의 석탑과 같은 것으로 사용하다가 가져왔을 것"이라고도 하였고, 더구나 그 시기도 "조선조에 들어와 일찍이 불교를 배척했음에 비추어 고려시대의 제작으로 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적었다.
우연하게도 세키노의 <한국건축조사보고>에 채록된 청계천 광교의 석물이다. 원래 이것은 '정릉(貞陵)'의 석물이었던 것인데, 세키노는 이 사실을 몰랐던지 "예전에 혹 절간의 석탑과 같은 것으로 사용하다가 가져왔을 것"이라고도 하였고, 더구나 그 시기도 "조선조에 들어와 일찍이 불교를 배척했음에 비추어 고려시대의 제작으로 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적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세키노 자신의 개인적인 영광도 없지 않았던지라, 1908년에는 공학박사의 학위를 수여하는 데에 그 근거로 제시된 자료의 하나가 바로 <한국건축조사보고>였다. 그리고 1917년에는 <조선고적도보>의 편찬으로 프랑스 학사원이 수여하는 상금을 획득하기도 했다.

세키노는 그렇게 처음부터 조선고적조사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모든 영역의 최고 '권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들은 그 자신이 오로지 조선미술사의 연구를 '선점'한 대가로 얻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그것은 바꾸어 말하여 <한국건축조사보고>가 남겨놓은 가장 심각한 폐해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그는 이미 100년 전쯤에 조금은 어설픈 건축조사의 기회를 얻는 것으로 문화예술의 영역을 독차지했고,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친 고적유물의 조사를 통해 자신만의 조선미술사를 견고하게 구축했던 것이었다. 그것이 조선의 문화예술에 대한 편견이었건 아니었건 간에 말이다.

누군가 해방 이후의 한국미술사는 '세키노의 극복' 그 자체였다고 평가한 것이 가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때로 이것이 '고유섭의 발견'으로 표출된 바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의 위력은 10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그다지 줄어들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복원공사에도, 청계천 오간수문의 원형확인에도, 미륵사 석탑의 해체수리에도, 법천사지의 발굴조사에도, 그때마다 어김없이 <한국건축조사보고>와 <조선고적도보>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내는 것은 당분간은 어려운 일이 될 듯싶다.

<한국건축조사보고>는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나?

세키노 타다시가 일본내각의 명을 받들어 1902년 7월과 8월에 걸쳐 한국의 고건축 및 유물의 현황을 조사한 결과를 담아, 두 해를 넘겨 1904년에 동경제국대학 공과대학 학술보고자료로 발표한 것이 바로 <한국건축조사보고>이다.

간혹 이 책을 두고 <조선건축조사보고>라고 소개한 경우도 더러 있으나, 그 때는 분명 '대한제국' 시절이었기에 <한국건축조사보고>라고 지칭하는 것이 맞고 또 원래의 제목 또한 그러하다.

이 보고서는 최초의 근대적인 고적조사보고였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더구나 여기에는 그 시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생생한 사진자료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자료가치는 남다르다고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교과서나 역사자료를 통해 익히 보아온 예전의 풍경들이 알고 보면 이 책이 출처였음을 확인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쨌거나 이 보고서에는 세키노가 직접 순방한 서울, 개성 인근, 부산, 통도사, 범어사, 경주지역, 영천 방면, 해인사 등지에 대한 조사결과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조사대상이 거의 경기도와 경상도 쪽에 한정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촉박한 일정 탓에 제 딴에는 효율적으로 조사를 진행하기 위해 몇 군데 지역을 전략적으로 선택한 결과였다고 풀이된다. 말하자면 신라의 역사유적을 확인하기 위해 경주지역을 우선적으로 선택한 것이고, 또 고려시대의 도읍지 개성과 조선시대의 도읍지 서울을 우선적으로 선택한 것 또한 그러한 맥락이었다.

그리고 평양과 부여지역은 세키노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부득이 조사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따라서 <한국건축조사보고>에는 고구려 및 백제지역의 건축물과 역사유적에 대한 서술이 완전히 누락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외부의 '훈령 제15호'(1902년 7월 16일자)에 표기된 세키노의 경유지역에 '부여'와 '은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원래는 백제지역도 당연히 조사대상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차질이 빚어져 이 곳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세키노의 건축조사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촉박한 시일이었다. 수천 년의 역사를 단 두 달만에 전부 파악하려고 했던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지만, 더구나 이 기간에는 "바야흐로 우기에 접어들어 강물이 범람하고 도로는 자주 막혀" 제대로 정밀한 조사가 이루어질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서울에 와서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주요 부분만 훑었으며 경희궁과 덕수궁은 규모가 작고 볼 것이 없다하여 아예 조사대상에서 제외했을 뿐더러 개성지역에서는 인천방면으로 떠나는 기선의 출항시각에 맞추기 위해 부랴부랴 나머지 조사를 포기하는 일도 없지 않았다.

그러니까 세키노의 보고서는 대개 몇 가지만을 관찰대상으로 하고 이를 확대 해석하여 건축과 예술의 특성을 지레짐작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어디를 가든지 세밀한 조사를 다른 날로 미룬다는 식으로 서술한 사례도 수두룩했다. 보고서의 많은 부분을 사진자료로 대체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이다.

말하자면 <한국건축조사보고>는 조금은 어설프게 만들어진 불완전한 보고서였다. 그리고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지만 '조선미술사'의 연구는 바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 이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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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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