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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와 가족회는 16일 낮 서울 정동 프란체스코 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면적인 사건 재수사를 촉구했다
칼 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와 가족회는 16일 낮 서울 정동 프란체스코 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면적인 사건 재수사를 촉구했다 ⓒ 서상일
제13대 대통령선거 당시 김대중 평민당 후보의 여의도 유세가 한창이던 지난 87년 11월 29일 오후 미얀마 남방의 안다만해 상공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칼(KAL) 858기 실종사건에 대한 새로운 의혹이 제기돼 당국의 대응이 주목된다.

칼 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와 칼 858기 가족회는 16일 오전 11시 서울 정동 프란체스코 회관 4층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실종자 명단 불일치 등 12가지 새로운 의혹(아래 상자기사 참조)을 제기하고 당국의 해명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와 함께 대책위는 법원의 사건 기록 정보공개 판결에 불복한 검찰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법원 판결에 대한 항소 포기 △전면 재조사 △실종자 가족과 국민에 대한 사죄 등을 검찰과 국정원에 요구했다.

대책위 부위원장 신성국 신부는 "법원의 정보공개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하는 검찰의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사회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구시대의 망령을 다시 한 번 느꼈다"면서 "시대와 국민적 요구를 외면한 검찰의 행태는 언젠가는 반드시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이 잦아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리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칼 858기 실종사건의 의혹 12가지를 새롭게 제기한다"면서 "특히 국가권력이 개입한 흔적이 있는 공안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을 바라는 국민 여망과는 달리 정보공개를 거부하는 것은 국민과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검찰을 겨냥했다.

대책위는 김현희가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던 87년 12월 2일 '폭약 세팅 후 정확하게 9시간이 지난 다음 폭파'라는 안기부의 발표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느냐며 의혹을 제기했다
대책위는 김현희가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던 87년 12월 2일 '폭약 세팅 후 정확하게 9시간이 지난 다음 폭파'라는 안기부의 발표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느냐며 의혹을 제기했다 ⓒ 서상일
실제로 지난 87년 11월 29일 동아일보 호외판 및 최종판(30일)에서 보도한 실종자 명단과 89년 서울지방법원 판결문에 나와 있는 실종자 명단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승무원으로 사고 직전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린 박은미씨는 지난 1월 가족회와의 전화통화에서 "바그다드 공항를 출발할 때 167석 좌석이 가득 찼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증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당시 안기부가 발표한 탑승객 99명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여 논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87년 12월 17일 일본 주간잡지 <주간 신조>에서도 "한국의 안전기획부 요원 2명과 서울로 가기로 예정되어 있던 외무부 관계자 11명 등 한국 고관 13명이 사고 직전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렸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어 이같은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가족회 신동진 사무국장은 "실종자 인원을 115명에 짜맞추기 위해 명단을 넣었다 뺐다 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라며 "비행기 이륙시간과 폭파시간도 대한항공 및 ICAO 발표와는 달리 안기부의 수사에서는 15분에서 20분 정도 앞당겨져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가족회 차옥정 회장은 "일본의 <TV아사히>는 사건 관련국들을 모두 취재해 23일 황금시간대인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두시간 짜리 특집 다큐멘터리를 방송할 계획"이라면서 "정작 사건 최대 피해국인 우리나라의 언론은 뭘 하고 있는지 정말 안타깝다"며 언론의 무관심에 서운함을 드러냈다.

차 회장은 이어 "무책임과 구태답습 그리고 수구적인 검찰의 행태에 채찍질을 해줄 수 있는 힘은 오로지 국민들로부터 나온다"며 "칼 858기 실종사건뿐 아니라 아직도 은폐되거나 진행 중인 공안사건들이 과거 냉전시대의 잣대로 재단되지 않도록 국민의 불같은 명령이 필요하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대책위는 폭파에 사용됐다는 라디오에 콤포지션C4 폭약 350그램이 들어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당시 안기부에서 제시한 물증들(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라디오 앞면, 라디오 뒷면, 폭약 350그람을 재는 저울, 폭약을 넣은 라디오)
대책위는 폭파에 사용됐다는 라디오에 콤포지션C4 폭약 350그램이 들어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당시 안기부에서 제시한 물증들(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라디오 앞면, 라디오 뒷면, 폭약 350그람을 재는 저울, 폭약을 넣은 라디오) ⓒ 서상일
한편 칼 858기와 김현희의 행적을 따라 현장 취재를 마친 것으로 전해진 일본 민방 <TV아사히>는 이날 기자회견을 상세히 취재했다. <TV아사히>는 '칼 858기 사건 의혹'에 대해 오는 23일 밤 특집 다큐멘터리로 2시간 동안 방송할 예정이다.

<TV아사히> 야스다(安田·29) 피디(PD)는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칼 858기 사건에 대한 여러 의혹들이 한일 두 나라에서 제기되고 있다"면서 "과거 행적을 들추면서 새로운 사실을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해 새로운 의혹 제기 가능성을 내비쳤다.

야스다 피디는 특히 한국의 언론에 대해 "계속해서 취재를 통해 진실이 가려진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이 여론화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한국에서는 관련 취재원이 일본보다는 더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외신에 의존하지 말고 직접 취재에 나서 실종자 가족들이 제기하는 의혹에 대해 풀어줬으면 한다"고 충고했다.

대책위가 제기하는 칼 858기 실종사건의 새로운 의혹

칼 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와 칼 858기 가족회가 제기한 12가지 의혹가운데 5가지를 집중 소개한다.

한국인 탑승객 더 있었나?

동아일보 호외에 실린 실종자 명단과 최종보도 명단, 그리고 서울지법 판결문의 실종자 명단에는 차이가 난다.

동아일보 호외와 최종보도에는 김창한씨의 이름이 있으나, 판결문에는 빠져있다. 또한 김해성, 정숙덕씨는 호외에는 이름이 있으나 판결문에는 빠져있으며, 김선호, 이종섭, 정외석씨는 호외에는 빠져있으나 최종보도와 판결문에는 이름이 있다. 그리고 이규운씨는 호외에만 이름이 있고 최종보도와 판결문에는 이름이 없다.

다시 한 번 실종자 명단에 차이가 있는 경우를 추리면 아래와 같다.

*호외 - 김창한, 김해성, 정숙덕, 이규운
*최종보도 - 김창한, 김선호, 이종섭, 정외석
*판결문 - 이규운, 김선호, 이종섭, 정외석

대책위는 위의 사실을 들어 안기부가 발표한 탑승객 99명 외에 실제로 탑승객이 더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아부다비에서 내린 11명 가운데 한국보안요원 2명과 고관이 있었다"는 일본 주간신조 1987년 12월 17일 기사와 "탑승석 160여 석이 거의 가득 찼었는데, 안기부 발표대로 99명이라면 가득 찼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당시 KAL 858기에 탔다가 내렸던 스튜어디스 박은미씨의 증언으로 주장을 뒷받침했다.

안기부, 이륙시간 조작하려 했나?

동아일보는 1987년 11월 30일 호외를 통해 비행기 이륙시간을 "05:42"으로 보도했다. 또한 대한항공 사과문(1987년 12월 2일)과 버마가 국제민간항공기구인 '이카오'(ICAO)에 제출한 조사보고서(1989년 2월)에도 비행기 이륙시간은 "05:42"으로 나온다.

그런데 안기부 수사발표문(1988년 1월 15일)에는 비행기 이륙시간이 "05:25분"으로 나와 차이가 난다.

폭파장치 조작시간 왜 자꾸 바뀌나?

안기부는 수사발표문을 통해 김현희 일행이 폭파장치를 세팅한 시간을 "05:05경(현지시간 11월 28일 23:05)"이며 또한 비행기 "탑승 전"에 한 것으로 발표했다.

"비행기 출발시간 20분을 앞두고 이들은 여행지 휴대용품으로 위장한 라디오 시한폭탄과 술로 가장한 액체폭발물의 폭발시간으로 9시간 뒤로 조작한 후 항공기에 탑승했다."

그러나 정보공개된 판결문(검찰기소 1989년 2월 3일)에는 "탑승 후"로 나와 안기부의 수사발표와 차이를 보인다.

"1987년 11월 28일 바그다드 공항에서 KAL 858 비행기에 탑승한 다음 액체폭약을 사용한 폭파용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탑승 무렵으로부터 9시간 후 폭발하도록 장치한 다음..."

뿐만 아니라 김현희는 자신의 고백록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에서 "탑승 전 04:40"에 폭파장치를 세팅했다며 또 다시 말을 바꾼다.

갑자기 등장한 점자암호표

안기부는 KAL 858기 실종사건이 북한의 폭파 범행이라며 그 증거로 북한에서 사용하는 점자암호표를 제시했다. 그것은 이미 남한 정보부가 파악하고 있는 암호표였다.

그러나 대책위는 이런 눈에 띄는 점자암호표를 왜 김현희 일행이 최초 억류된 바레인에서는 발견하지 못하다가 한국에 압송된 이후에 갑자기 등장한 것인지 그 경위에 의혹을 품는다. 대책위는 서울신문 1987년 12월 6일자 "우리 수사관들 두남녀 소지품 정밀검사" 기사를 포함한 당시 언론에는 어디에도 점자암호표를 발견했다는 내용이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했다.

KAL 잔해라고 보도했던 기체조각 왜 폐기했나?

KAL 실종사건이 나고 2년 뒤인 1989년 두 조각의 기체 잔해가 발견된다. 안기부는 그 조각이 폭파된 KAL 기의 잔해라고 알렸다. 그런데 유일한 물증인 그 기체조각을 안기부가 폐기한 것이 최근 알려졌다(<한겨레21> 2003년 12월 4일).

진상규명에 결정적 단서가 될 이 잔해를 왜 폐기했을까?
/ 서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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