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돌돌 가랑잎을 밀치고
어느덧 실개울이 흐르기 시작한 뒷골짝에
멧비둘기 종일을 구구구 울고
동백꽃 피 뱉고 떨어지는 뜨락
창을 열면
우유빛 구름 하나 떠 있는 항구에선
언제라도 네가 올 수 있는 뱃고동이
오늘도 아니 오더라고
목이 찢어지게 알려 오노니
오라 어서 오라
행길을 가도 훈훈한 바람결이 꼬옥
향긋한 네 살결 냄새가 나는구나
네 머리칼이 얼굴을 간질이는구나
......
유치환 <낙화> 중에서
봄이 오려나 보다. 아니 어느새 봄이 내 가슴 속에 살그머니 다가와 있었다. 얼음장을 깨친 실개울 소리에 놀란 동백꽃이 수줍게 피었다가 지난 밤 빗소리에 놀라 피응 뱉으며 떨어지듯…. 봄이 오는 길목, 남도의 이름 모를 항구의 뱃고동 소리가 부드럽게 나를 부른다. "동백꽃은 이미 붉게 피었는데 정녕 오늘도 아니 오더냐"고.
뱃고동 소리의 유혹이 아니더라도 이제 막 훈훈해진 바람결 따라 향긋한 동백꽃 향기를 맡으러 떠나야겠지? 남도로 달려가고 있는 내 마음 속에는 이 무모한 여행이 '미친 짓'이라는 악마와 '잘한 일'이라는 천사가 서로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부처의 모습을 닮은 달마산 봉우리
한반도 남쪽 끝절, 미황사는 호남의 금강이라 할 만큼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달마산 서쪽 중턱에 있다. 남쪽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이라는 찬사가 무색하게도 미황사 가는 길은 불확실한 이정표로 찾는 이의 애를 먹였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겨우겨우 미황사 초입에 들어섰을 때 명치 끝이 꽉 막힌 듯 갑자기 숨을 쉴 수 없었다. 고백하건대 곧바로 하늘을 찌를 듯이 다가오는 기기묘묘한 모습의 뾰족 봉우리의 위용에 압도당했다고나 할까? 질식할 것 같은 놀라움, 바로 미황사와의 첫 만남, 첫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어느 순간 놀랍기만 하던 그 뾰족 봉우리들이 갑자기 둥글둥글 부처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혹 달마산에 불성(佛性)이 깃들어 있는 것인가? 갑자기 중국의 유명한 선승 조주선사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느날 어떤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있느니라."
"있다면 어째서 가죽부대 속에 들어 있습니까?"
"그가 알면서도 짐짓 범했기 때문이니라."
다른날 다시 어떤 스님이 똑같은 질문을 조주선사에게 하였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 했는데, 개에게는 어째서 없다고 하십니까?"
"개에게는 업식(業識)이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이 봉우리를 보며 부처를 느꼈듯 달마라는 범상치 않은 산 이름과 미황사라는 절 이름이 절묘할 정도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 왕족 출신으로 출가하여 타국에 불교를 포교하고자 혈혈단신 중국 땅으로 건너온 달마대사의 행적이나 한국불교 모두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 아닌 인도에서 직접 전래되었음을 증명하는 이 절의 창건설화가 너무나 유사했기에 더더욱 놀라웠다.
신라 경덕왕 8년(749) 돌배(石船) 한 척이 홀연히 달마산 아래 사자포에 와닿았는데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돌아서면 가까이 오기를 며칠 동안 계속했다. 의조화상이 정운, 장선 두 사미승과 향도 백명을 데리고 목욕 재계하고 기도하니 배가 육지에 닿았다. 배 안에는 금으로 된 뱃사공과 금함, 60 나한, 탱화 등이 가득 차 있었다. 또 검은 바위를 깨뜨리자 소 한마리가 뛰쳐 나오더니 삽시간에 큰 소가 되었다.
그 날 의조화상의 꿈에 몸 전체가 금으로 뒤덮인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는 우전국(인도) 왕인데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지으면 국운과 불교가 흥황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 나가 보니 소가 달마산 중턱에서 한번 넘어지고 또 일어나서 한참 크게 울며 넘어지더니 일어나지 못했다.
이에 의조화상은 소가 처음 멈췄던 곳에 통교사를 짓고 마지막으로 멈춘 곳에 또 절을 세웠다. 그리고 꿈에서 본 소 울음 소리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해서 아름다울 미(美) 자를 넣고 금인(金人)의 빛깔에서 누를 황(黃) 자를 따서 미황사(美黃寺)라 지었다고 한다.
미황사가 있는 서정리는 예전에 우분리라고 불리었다는데 불경을 짊어지고 쓰러져 죽은 소를 이 마을에 묻은 곳이라는 뜻에서 나온 듯하다.
그러고 보면 불성은 달마산과 미황사 구석구석 어디에고 촉촉하게 스며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불성은 미황사를 찾은 나에게, 내 이기심의 뿌리에도 촉촉히 스며들고 있었다. 마치 마른 이끼에 젖은 듯 만 듯 스며들면서도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물의 자비처럼. 미황사에 대한 두번째 느낌은 물처럼 무변장대한 불성과의 만남이었다.
샘물 속 동백꽃 띄워진 사연
지금 미황사는 붉은 동백꽃이 한창이다. 바위산 능선을 병풍처럼 두르고 동백나무 숲으로 감싸인 절 진입로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화장기 없는 맨얼굴로 당당하게 서있는 단청 없는 대웅보전이 한 눈에 들어온다.
1754년 영조 때 중건했다는 대웅전(보물 제947호)은 비록 단청 하나 없어 겉보기에는 소박해 보일지 몰라도 처마며 주춧돌이며 건물 구석 구석 세심한 장인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기단 위의 우아한 차림새와 내부를 장식한 문양과 조각이 아름답다. 물고기, 게, 문어 등 바다 생물이 양각돼 있는 주춧돌은 불교가 이 땅에 유입되었을 때 기존 세력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토속신앙과의 합리적인 절충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웅전 뒤편의 응진당(보물 제1183호)도 대웅전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는데 내부 벽면에 수묵으로 그려진 벽화의 유려한 선은 뒤쪽 달마산 봉우리 선과 잘 어울린다. 대웅보전 앞쪽 계단 아래에는 기우에 영험 있다는 괘불을 걸어 놓는 괘불걸이가 나란히 서있다. 속칭 영험있는 하느님의 마누라로 통하는 미황사 괘불은 지금의 대웅전이 중건되기 전인 1727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높이 10여m의 탱화와 같은 거대한 걸개 그림이라고 한다.
속설이 무성한 대웅전 앞에서 너른 마당을 한동안 굽어보았다. 이른 아침이라 손님도 주인도 없는 너른 앞마당에는 지금 한창 꽃망울을 틔운 동백꽃이 지난 비를 이기지 못하고 스르르 떨어져 마당 구석 구석 수북이 쌓여 있었다.
마침 고즈넉한 분위기를 깨는 산새 소리가 들려온다. 순간, 절 초입 계단을 오를 때 언뜻 보았던 묵언이라 쓰인 당부 안내판이 생각난다.
'아서라, 산새야. 그 소박한 울림 때문에 행여 묵언 수행에 방해될까 걱정이다.
아서라, 산새야. 네 소리 때문에 동백꽃의 붉은 울림이 깊어질까 걱정이다.'
시원한 물 한모금이 생각나 마당가 돌샘을 찾아 물 한모금 얻어 먹으려 했더니 샘물 속에 붉은 동백꽃이 그윽하게 떠있다. 물 맛보다는 문득 동백나무와 떨어져 있는 돌샘에 동백꽃이 떨어져있는 사연이 궁금했다.
바람에 실려왔을까? 아니면 수행 중 누군가가 봄의 낭만을 즐기고자 몰래 띄워 놓았을까? 그 비밀스러움에 혼자 상상해 보니 객쩍은 웃음이 절로 나온다. 물 위에 동동 떠있는 붉은 동백꽃잎을 보니 달마대사의 법을 이어받았다는 혜가대사가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법을 전하기 위해 지었다는 시가 생각난다.
"내가 본래 이 땅에 온 것은
법을 전해 어리석은 이를 제도하려는 것이니
한 송이의 꽃에서 다섯 꽃잎이 벌어져
열매는 자연히 이루어지리라."
한송이 꽃에서 꽃잎이 활짝 벌어져 열매를 자연히 이루듯, 달마대사의 정신이 스며있는 이곳 달마산 자락에도 도의 완성을 기원하는 혜가대사의 넋이 동백꽃에 스며들어 그리 붉은 것이 아닐까?
3월 중순, 남도 끝자락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 미황사의 동백꽃은 한풀이라도 하려는 듯 붉게 피어 있었다. 바로 미황사에 대한 세번째이자 마지막 나의 느낌을 묻은 채로. 자동차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보길도를 행한 선착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