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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일 저녁 7시께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고 최옥란 열사 2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 김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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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촛불 문화제는 강제 해산 시키지 않으면서 왜 우리 추모제는 강제 해산 돼야 합니까? 촛불이 없어서 입니까? … 우리는 지구에 살지만 지구 밖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2년 전 3월 26일. 현실성 있는 국민기초보장생활제도를 촉구하며 어느 장애인 여성이 봄을 등지고 자살을 택했다. 가난, 장애, 실업, 여성 등 온갖 세상의 굴레를 짊어졌던 그의 이름이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다. 장애해방 운동가 고 최옥란. 그는 죽어서도 투쟁 현장을 떠나지 못했다.

집회와 문화제의 정확한 기준은 무엇일까. 광화문 '촛불 문화제'를 주도한 4명에 대해 '미신고 야간 불법 집회'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돼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경찰은 고인을 기리는 문화제(최옥란 열사 추모제)가 현장에서 강제 해산됐다.

경찰은 장애인 해방 운동가 고 최옥란 열사 2주기 추모제를 문화제가 아닌 집회로 간주해 강제 해산시켰다.

집회와 문화제의 기준?

2년 전 3월 27일에서도 명동 성당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진행한 최씨의 '노제'가 경찰에 의해 무산됐다. 2004년 봄. 세종문화 회관 앞에 놓여진 고(故) 최옥란씨의 헌화가 또 다시 전경들의 군화에 짓밟히고 말았다.

26일 오후6시 최옥란 추모위원회와 4.20 장애인차별철폐투쟁공동기획단이 주최한 '故 최옥란 열사 2주기 추모제'는 경찰의 강제 진압으로 인해 투쟁 현장이 되고 말았다.

앞서 그들은 오후 2시에 치러진 '4.20 장애인차별철폐 투쟁선포 결의대회'후 추모제를 위해 무대를 설치했지만, '무대를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강제 철거당했다.

ⓒ 김진석
행사 준비에 차질이 생기자 자연스레 추모제는 어스름한 7시 즈음에야 시작됐다. 추모제에 참석한 장애인과 비장애인 200여명은 '차별에 저항하라'는 글씨가 박힌 노란 조끼를 입고 있었으며 경찰이 투입한 5개 중대에 둘러싸여 있었다.

전경들은 추모제가 시작되자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전열을 가다듬고 주변에 설치된 선전 깃발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몇 차레 자진해산 하라는 경찰의 경고와 아랑곳없이 참석자들은 저무는 해를 뒤로 고(故) 최옥란씨의 기억을 되새겼다.

추모제의 내용은 고인의 활동을 기록한 영상상영, 추모시 낭독, 민중 가수들의 노래(젠, 류금신), 공동연대사 등으로 채워졌지만 결국 경찰의 강제 진압으로 도중에 중단되고 말았다.

장애여성공감의 박영희씨는 "그녀를 추모하는 것조차 막혀버렸다, 전경에 밟힌 국화꽃이 차별받고 억압받았던 그녀의 삶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이번에도 우리는 그녀를 위한 꽃바구니 하나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비록 국화꽃은 꺾여도 우리는 그녀의 정신이 실현될 때까지 계속 투쟁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장애인이동권연대 박경석씨는 "광화문 촛불 문화제에 모인 사람들은 강제 해산 시키지 않으면서 왜 우리 추모제는 강제 해산 돼야 하는 것인가?"라고 반문하며 "촛불이 없어 우리를 잡아가는 것이냐?"고 말문을 열었다.

박씨는 "어차피 우리는 아무런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지구 밖 사람들이고 언론에 보도가 되지 않아도 좋다"며 "국가에서는 매일 예산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차떼기들의 돈 일부가 쓰여도 우리가 이리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을 이었다.

ⓒ 김진석
이어 그는 "우리가 폭력을 썼는가? 아니면 불법 시위물을 가지고 나왔는가?"라고 재차 항의하며 '추모제' 강제 해산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의 목소리는 주위를 에워싼 전경들과 도로 변의 차소리로 인해 '그들만의 소리'가 되었다. 어느 덧 마이크는 끊겨버렸고 그들의 육성은 점점 조여 오는 전경들의 군화와 무전기 소리에 파묻히고 말았다.

저녁 8시 40분께. 본격적인 경찰의 강제 진압이 시작됐다. 경찰은 먼저 남성 참가자들을 끌어냈고 이어 여경들을 불러 여성 참가자들은 끌어냈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자리에 앉아 서로 팔짱을 낀 체 "집회자유 보장하라! 장애차별 철폐하라! 장애희망 쟁취하자!"등을 외치며 완강히 저항했다.

"빨리 집회를 철회하세요"

시간이 지날수록 참가자들의 반발도 거세져 장애인들이 휠체어에서 내려 길바닥에 드러눕는 등 발버둥을 쳤지만 속수무책으로 연행되었다. 경찰들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오세요, 흥분하지 마십시오", "빨리 집회를 철회하세요"라고 말하며 참가자들을 강제 연행했다.

이에 참가자들도 "건드리지마", "누가 누구에게 철회 명령을 하느냐?", "장애인 해방이 뭐가 잘 못 된 것이냐"라고 반박하며 서로 낀 팔들을 풀지 않으려 했다.

이런 대치 상황은 늦은 밤 10시가 넘도록 계속 됐으며 결국 73여명이 연행 돼 고(故) 최옥란 열사의 추모제는 강제 해산 되고 말았다.

ⓒ 김진석
“도대체 최옥란 이 양반은 살면서도 그렇게 고생을 하시더만, 죽은 날 조차도 노제를 거부당하고, 또 이번에도 투쟁이 되버렸네요. 그동안 고생만 했으니 이젠 좀 무대도 쌓고 그럴싸하게 해서 뭔가 좋게 편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뭔 놈의 팔자가 그렇게도 기구한지…아마 그 사람은 죽어서도 투쟁 현장을 못 떠날 사람인가 봅니다.”

최옥란 추모위원회 김태현씨의 추모사이다. 2년 전 최씨의 노제가 거부당했던 그 날과 이날의 추모제는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최씨를 위로하기 위한 새하얀 국화꽃은 소리없이 그렇게 또 한번 똑같이 꺽이고 말았다.

한편 4.20장애인차별 투쟁 공동 기획단은 26일을 기점으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장애인의 날인 4월 20일까지 장애인차별철폐를 촉구하는 천막 노숙 투쟁을 전개할 예정이다.

ⓒ 김진석


"취재기자가 현장에 남아있던게 불법인가요?"
[취재수첩] 처음으로 수송 차량에 끌려갔던 날

"기자분들은 모두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26일 저녁 8시30분께. 추모제를 강제 해산 하려는 경찰의 행동이 본격화 됐다. 추모제 참가자들을 에워싼 전경들은 점점 조여들기 시작했고 드디어 서로 몸싸움이 시작됐다. 끌어내려는 자와 나가지 않으려는 자. 그들 사이에 있던 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눈에 보이는 걸 수첩에 옮기는 것 뿐이었다.

한편에선 “계속 기자분들은 나와주세요” 라는 말이 들리기도 했지만, 바로 눈 앞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을 벗어날 순 없었다. 사건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 현장을 취재하러 온 것이지, 그저 전경들의 뒷모습을 보러 온 건 아니였기 때문에.

계속 수첩하나 들고 간신히 버티고 있던 순간. 어디선가 “저 여기자 끌어내” 라는 소리가 들렸고, 전경 세 명에게 원인도 모른 채 수송차량으로 끌려갔다. 가는 도중 아무리 기자라고 몇 번을 말하고 연행 이유를 물었지만, 그들은 ‘일단 차에 타세요’ 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차에 탄 후에도 기자 신분증을 정식으로 제시하며 끌려온 이유가 무엇이냐고 재차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묵비권을 행사 할 수 있다” 라는 이해못할 말 뿐이었다.

수송차량에 먼저 연행 돼 있던 최옥란열사 추모위원회 김태현씨가 연행된 기자를 보고 “이 사람 기자 맞아요, 취재하러 온 사람이에요” 라고 말을 해도 그들은 별 다른 답변이 없었다. 기자가 계속 항의를 하자 전경들은 서로 얼굴을 보며 대답을 미룰 뿐이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결국엔 동행했던 사진 기자에게 전화로 상황을 알렸고 찾으러온 사진 기자의 항의로 그때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업무상 생긴 오해라고 말을 전하며 이해를 구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끌려가는 순간부터 수송 차량에서 내려 온 순간까지를 생각하면 ‘왜’ 라는 의문이 계속 끊이질 않는다. 현장에 남아있었던 게 불법이었나? 왜 신분증을 제시해도 바로 풀어주지 않았을까? 왜 전경들은 기자 질문에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을까? 계속 생각해도 기자의 상식으로는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라는 의문에 대해 정확한 답변을 듣기까지 기자는 앞으로도 같은 상황이 재현된다면 또 망설임없이 똑같이 행동 할 수 밖에 없다.
/ 김은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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