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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동냥으로 한때 해방신학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뚜렷한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 볼 수는 없겠지만 대충 가닥을 잡아보면 이렇다.

부유한 유럽국들이 개발을 시켜준다는 명목으로 가난한 중남미 국가들에게 차관을 대 준다. 하지만 경제가 호전되기는커녕 더욱 곤궁에 처하게 되자, 그 이유가 자국의 경제 문제 때문이 아니라 참다운 삶을 할퀴고 있는 유럽국가들의 정치적인 구조 악 때문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해방을 위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된다.

거기에 일부 신학자들도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이라는 명목 하에 그런 해방을 위한 투쟁에 온 몸을 던지게 된다. 그게 바로 해방신학을 둘러싼 굵은 실타래라 할 수 있다.

그 해방신학을 배우면서 파울루 프레이리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그가 쓴 <페다고지>(남경태 옮김·그린비·2002)란 책을 얼마 전 읽게 돼 무척 고무되었다.

브라질의 빈민지역 레시페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가난하고 억눌린 삶을 살아온 프레이리의 평생 과제는 민중의 굶주림과 고통을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20대부터 문맹자 퇴치 교육에 힘썼던 그는, 1964년에는 군부쿠데타로 인해 16여 년의 망명생활을 보내게 된다.

그 기간 동안 인접한 나라 칠레에서 성인들의 문자해독 교육에 힘쓰는 한편,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구 생활을 하기도 하고, 제네바의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성인 민중의 교육을 위해 애쓴 결과 나온 것이 1970년에 집필한 <페다고지>다. 오늘에서야 이 책을 읽은 나는 좀더 이 책을 빨리 접했더라면 인간을 향한 바른 교육의 지평을 훨씬 더 일찍 넓혀갈 수 있지 않았겠나 하고 후회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가슴에 깊이 남는 것은 프레이리가 이 책을 통해 제시한 참다운 인간 해방을 위한 교육 방법이었다. 특히, 농민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일상적인 삶의 용어로 그들의 이해를 도왔다는 프레이리의 언어사용이 우선 내 의식을 자극했다.

오늘을 사는 대부분 식자층들은 으레 자신의 논리를 미사여구로 고급화시킨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와 생각을 일반 서민들이 이해하기란 깨나 거리감이 있다. 당연히 판박이 틀에 짜 맞춰진 고급 언어를 사용하는 학자들과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꾸밈없이 사용하는 일반 서민들 사이에는 차별과 소외만 나타날 뿐이다. 논문이나 법원의 판례도 그렇거니와 의사들의 처방전도 일반 서민들에겐 낯설고 이질적이다.

그런 과제들을 풀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프레이리는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시키는 '은행 저금식' 교육을 탈피해, 서로 공동 탐구자가 되는 '문제 제기식' 교육을 병행해 나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오랫동안 강의한 노트 창고에 적혀 있는 내용을 빼내어 전달해 주면 받아먹는, 그런 은행 저금식 수업은 아직도 상아탑 강단에서 흔한 일이다. 자신을 쇄신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물을 발굴하는 교수도 드물뿐더러 똑같은 교안을 몇 해 동안이나 사용하느냐며 문제를 제기하는 학생도 거의 없다.

물론 진지한 고민 속에서 창의적 발상을 이끌어 내는 쌍방향 수업 방식을 채택하는 피학습자도 더러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쌍방향 토론식 학습 방법을 병행해 나간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학습자의 창의적 발상에 전적인 동의를 보내는 피학습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 부분을 지적한 프레이리는 정답을 정해 놓고 토론을 벌이는 방법에서 탈피해 한 단계 더 성숙한 차원의 방법을 주문하고 있다. 이를테면 지리산 천왕봉이 하나지만 여름철 그 곳을 오르는 길이 백무동, 노고단, 뱀사골 코스 등 다양한 것처럼 모든 문제에 대한 답변을 다양하게 토론하며 예측하도록 하는 식이다.

물론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허의 토론장이 진행될 수 있어 긴장감마저 돌 수 있겠지만, 그만큼 흥미 있고 참신한 아이디어들이 대거 쏟아질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렇게 언어의 간격을 좁히고, 문제 제기식 쌍방향 교육방법으로 인한 진지한 토론과 수용차원의 양다리 효과를 가져온다 해도 '프랙시스(실천)' 없는 언어나 교육 방법은 절름발이 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실천적 이론을 떠난 탁상공론식 언어나 교육은 이 땅에 얼마든지 많지만, 종합적인 언행일치를 주문하고 있는 언어나 교육은 드물다고 프레이리는 지적한다.

청산유수처럼 말에는 거침이 없으나 행동에서만큼은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 인간 유형은 이 땅에 얼마든지 있다. 나를 비롯해 내 생활 반경에 사는 인간들에게서 그런 예는 손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수만 마디로 사랑을 읊조리며 열변을 토하는데는 익숙하지만 정작 사랑의 실천적 행동에는 낯선 피학습자도 이 땅에는 많이 있다.

이 책을 덮고 나니, 자유를 찾기까지 감옥에서 해방될 날만을 기다리던 어떤 사람의 옥중 이야기가 생각난다. 감방 속 죄수들에게 어느 날 강연회가 열려서 그 사람은 귀담아 듣기 위해 강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고 한다. 가방 속에까지 지식을 담아 왔던 안경 낀 교수의 강연과 빈손의 남루한 옷차림에 그 흔하디 흔한 졸업장 하나 없는 평범한 사람의 다른 강연이 연이어 진행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강연은 전자가 아닌 후자의 강연이었다는 이야기다. 그 이유는 아마도 참다운 언어나 지식은 책 속이나 서가 위에 꽂혀 있는 게 아니라, 경험과 실천이라는 통합 속에서 그 진가가 발휘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책도 역시, 인간 해방의 교육은 결코 삶과 동떨어진 게 아니라 참다운 삶 속에서 성취될 수 있음을 제시해 주고 있었다.

페다고지 (50주년 기념판)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 그린비(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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