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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선에서 미끄러져 물속으로 빠진 이안 소프
출발선에서 미끄러져 물속으로 빠진 이안 소프 ⓒ 오지 미디어 서비스
지난 3월 27일 시드니올림픽수영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호주 수영의 영웅' 이안 소프(21) 선수가 출발도 못해보고 실격당했기 때문이다.

사건은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이안 소프가 400m 자유형 종목 출발선에서 중심을 잃고 미끄러져 물 속으로 처박힌 것. 출발신호는 그 다음에 울렸다. 그 레이스는 단 한 번으로 올림픽대표선수를 선발하는 결승전이었다. 세계 챔피언이 국내 예선에서 탈락하는 이변이 발생한 것이다.

400m 자유형은 이안 소프의 주 종목이다. 그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 출전하여 세계신기록을 기록하면서 금메달을 따냈고 지난 6년 동안 세계신기록을 굳건히 지켜오는 중이어서 호주인들은 그가 아테네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딸 것으로 기대했다.

"법대로 해야한다"가 다수 여론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충격적인 결과에 잠시 혼돈에 빠졌던 호주 수영계가 '솔로몬의 지혜'와 같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냈다. 이안 소프의 실격으로 대신 선발된 크레이그 스티븐스 선수가 스스로 양보하도록 권유하자는 안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는 곧바로 여론의 벽에 부딪쳤다. '금메달'도 중요하지만 '법대로'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공정함을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호주 사람들다운 엄정한 목소리였다.

채널10 TV와 <시드니모닝해럴드> 등에서 실시한 전화여론조사의 결과에 의하면 호주의 금메달 획득을 위해서 스티븐스 선수가 양보해야 한다는 의견은 20% 대에 머물렀고 규정대로 스티븐스 선수가 출전해야 한다는 의견이 80%를 넘었다.

호주올림픽위원회(AOC)의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물론 협상의 여지는 남아있다. 그러나 그 협상조차도 전적으로 스티븐스의 선택과 결정에 달려있다. 우리는 그의 결정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안 소프도 인터뷰를 통해서 "그 누구도 스티븐스에게 부당한 압력을 가할 수 없다. 그는 정정당당하게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고, 올림픽예선통과 최저기준 기록보다도 4초나 앞서 있다. 그가 규정에 따라 선발되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존중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크레이그 스티븐스가 그날 기록한 3분 50초 44는 세계 10위권 밖의 기록으로 이변이 없는 한 메달획득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이안 소프는 세계신기록 보유자로 지난 2002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분 40초 08을 기록했다. 0.1초 차이로 순위가 결정되곤 하는 수영경기에서 10초 이상의 기록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큰 간극이다.

숨막히는 미국과의 수영 자존심 경쟁

호주는 전통적인 수영 강국으로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무려 11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그러나 최근 상승세를 타고 있는 미국 수영 팀 때문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그동안 이안 소프의 기세에 눌려 호주 팀에 연전연패한 미국 팀은 아테네올림픽을 역전의 기회로 삼고 있었다.

수영종목 금메달 수를 놓고 올림픽이나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는 두 나라는 금년 아테네올림픽에서도 한 치의 양보 없는 자존심 대결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 때문에 어깨수술을 세 번이나 한 페트리샤 토머스(26·여자접영 100m)가 세 번째로 아테네올림픽에 출전하는 고육책까지 동원하고 있다.

결국 금메달 한 두 개 차이로 호주와 미국의 승패가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이는데 사정이 이렇다보니 호주의 역대 수영 금메달리스트들과 현 수영대표팀 동료들은 스티븐스의 양보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스티븐스 자신도 자신에게 가해지는 엄청난 압력의 중압감 때문에 TV 나 신문도 보지 않고 고뇌를 거듭하고 있다고 한다.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 미국과 경쟁하는 호주 수영 팀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더욱이 이안 소프와는 어릴 때부터 각별하게 지내온 친구 사이일 뿐만 아니라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200m 자유형 릴레이에 함께 출전해서 금메달을 일구어낸 동료선수다.

룰에 깨끗이 승복한 스포츠 정신

요즘 호주 사람들은 스티븐스가 어떤 결정을 할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심지어 그의 결정을 놓고 도박을 거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한편 많은 수영 전문가들은 "잘못된 규정 때문에 이안 소프가 실격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안 소프는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후 그의 400m 자유형 출전 여부 못지 않게 큰 이야기 거리 하나가 더 늘어났다. 그의 세계 챔피언다운 의연한 언행이 바로 그것이다. 스물 한 살의 젊은이지만 자신을 냉정하게 컨트롤할 줄 아는 거인이라는 것이다.

이안 소프가 풀장 밖으로 나왔을 때 라인 심판 존 케피가 그에게 다가가서 한 말은 "안 됐지만 출발규정을 어겨서 실격됐다"는 말 한 마디였다. 이안 소프의 대답도 딱 한 마디였다. "알았다."

그와 중거리 종목 라이벌이면서 1500m 세계기록보유자인 그랜트 휴잇 선수는 그 장면을 목격한 다음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이안 소프에게 존경심까지 생길 정도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에 내 주종목인 1500m 자유형 경기에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면 나는 이안 소프처럼 나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의자를 집어던지지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는 조용히 칸막이 뒤로 사라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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