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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하면 흔히들 전남 보성의 녹차 밭을 이야기하며 극찬을 한다.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던가? 얼마 전 기자는 케이블 TV 전북방송에서 보내는 맛기행 프로그램 <아이고 맛있는 세상>의 녹화를 위해 정읍을 찾은 모 대학 교수와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 정읍의 천원차
ⓒ 이용찬
필자가 자생 녹차의 시원인 정읍의 천원차(川原茶)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그 교수가 대뜸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일이라며 상품성 없는 정읍지역의 음식문화를 나무랐다.

정읍의 차(茶)에 관한 이야기는 자료를 들어 설명하긴 어렵지만, 여러 문헌을 통하여 소개되곤 한다.

구전되는 이야기는 초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문헌상으로는 조선시대 신증 동국여지승람(제34~35)의 기록을 들 수 있다.

일제시대 <조선의 차와 선(이에리리 가즈오)>이라는 책에서는 정읍의 오가와(小川)차밭 다원 개설의 동기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1913년 전남도청의 산림기사들은 전북 정읍에 야생차가 무성한 것을 보고 토질과 기후가 차의 재배에 적합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인 오가와가 9반보(反步)의 차나무를 재배하게 되었다."

개원하여 7년 동안은 경험 부족으로 채산성이 없다가 1923년부터 품질이 우수한 가와바라차(川原茶)를 오사카까지 판매하였다고 전해진다.

일제시대에 입암면 일대에는 오가와 차밭, 대정차밭, 금정차밭 등 6개의 차밭이 있었고, 일본인 시리끼(한국명 근태)라는 사람이 3만평의 차밭을 조성하면서 정읍 일대에 씨앗을 파종하였으며, 화엄사에서도 씨앗을 가져가 파종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전남 광주와 보성에서 시리끼라는 일본인에게 차 재배기술을 배워갔다고 전한다.

해방 후 당시 40대 초반의 시리끼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입암면 일대의 차밭은 주인없는 땅이 되었고, 차밭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 속에서 전주검찰의 서기라는 사람이 그 땅의 명의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었는데, 계속 방치되다가 농민들에 의해 벌목되어 논과 밭 그리고 과수원으로 변했다고 한다.

예로부터 정해마을 인근은 아열대의 최북방에 위치하고 북방 한대기후의 최남방 지역으로서 평균기온 12.8도, 평균최고기온 18.5도, 평균최저기온 7.7도, 평균습도 74%, 평균 감수량 1286.1MM, 평균풍속 1.1 이라는 농산물과 녹차밭 조성에 가장 적합한 기후로 알려져 있다.

거기에 가파른 산세와 아침나절까지 짙게 깔리는 물안개 등 기후와 토양이 차밭에 적합해 삼국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정읍차의 명성의 바탕이 되고 있다.

정읍은 문화의 성지인 동시에 또다른 문화를 파생하고 잉태하는 고장이다. 음식문화라고 하더라도, 단순히 음식자체만으로는 독특한 향기를 전할 수 없다.

게장 백반이면 어떻고, 쑥국이면 어떻고 붕어찜이면 또 어떠리? 음식문화에 못한 것은 뭐고 잘하는 건 또 뭔가? 마주하여 함께하는 정감 있는 밥상이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그 안에 오롯이 담긴 문화의 정수를 맛보아야 하지 않을까?

정읍의 정체성은 음식문화가 말해주는 것이 아닌 뿌리 깊은 문화에 살아있는 예술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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