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단양 적성
단양 적성 ⓒ 우동윤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에는 국보 제198호인 단양 적성비가 있다. 단양적성비 아래로 잘 축조된 성의 흔적도 남아 있는데, 이것이 바로 신라 진흥왕이 쌓은 단양 적성(丹陽 赤城)이다.

축조됐을 당시에는 900여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성이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거의 다 붕괴됐고 남은 것은 한 눈에 다 보일 정도의 크기이다. 중앙고속도로 단양 휴게소에서 보면 적성과 적성비가 함께 보인다.

곳곳이 붕괴돼 있다
곳곳이 붕괴돼 있다 ⓒ 우동윤
앞으로는 너른 개활지가 보이고 뒤로는 물과 함께 가파른 산비탈이 있어 성을 쌓기에 최적의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성을 가까이 살펴보면 큰 돌들을 어쩌면 그렇게 조화롭게 잘 맞춰 쌓았는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아무 장비없이 그저 사람의 힘으로만 쌓았을 법한 성을 보고 있자니, 이름 모를 일개 병사들의 땀과 노력이 성의 견고함과 함께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가파른 산비탈 위, 강을 마주하고 있는 적성
가파른 산비탈 위, 강을 마주하고 있는 적성 ⓒ 우동윤
군대에서 봄과 가을 매년 두 번씩 진지 작업을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돌과 잔디, 폐타이어를 등에 지고 가파른 산길을 하루 종일 오르락내리락 하던 고향 떠난 이등병의 심정을 말이다. 인지상정으로 이곳에 서니, 1500여 년 전 적성을 쌓던 병사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고등학교 국사 시간,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물었다.
“경복궁 재건은 누가 했나?”
우리는 일제히 대답했다.
“대원군이요~"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원군이 시켜 팔도에서 징발돼온 민초들이 했지.”

그 이후로 역사 속의 장대한 흔적들을 접할 때면 항상 구석구석에 배어 있을, 이름 모를 사람들의 또다른 흔적을 느끼고자 애를 썼다. 하지만 유적의 기록은 항상 높고 고귀하며 힘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담고 있다.

국보 제 198호인 단양적성비에는 적성과 관련된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기록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때마침 적성비는 보수 공사 중이라 미처 이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대신 쇠파이프로 둘러싸여 있는 건물과 더러운 담요로 덮여 있는 적성비의 모습을 보고노라니 못내 아쉬웠다.

보수공사 중인 단양적성비
보수공사 중인 단양적성비 ⓒ 우동윤
1978년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굴된 단양적성비에는 신라의 국경 개척을 돕고 충성을 바친 야이치란 사람의 공훈을 표창하고 진흥왕을 도와 신라의 영토확장에 공을 세운 인물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들의 활동 시기 등으로 볼 때 단양적성과 적성비는 진흥와 6~11년인 서기 545년~550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적성비 앞 안내판에 기록돼 있다.

견고하게 축조된 단양적성
견고하게 축조된 단양적성 ⓒ 우동윤
단양적성비 아래로 적성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전쟁에서 이긴 장수가 뿌듯한 마음으로 점령지를 내려다 보았던 곳인 듯하다. 또한 적성 너머로 너른 개활지가 보이고, 뒤에는 가파른 산비탈 아래로 강이 흐르고 있었다.

적성 위에서 치열한 전투를 끝내고 성까지 쌓아 올리는 등 고된 노동 후, 고향을 그리며 눈물 지었을 법한 어느 신라 병사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