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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카슬 럭비팀과 파라마타 럭비팀의 격돌
ⓒ 오지 미디에 서비스
바야흐로 스포츠의 계절로 접어들었다. 한국에서 하계스포츠인 프로야구가 개막된 날, 호주에선 동계스포츠인 럭비시즌이 개막됐다. 두 나라의 하계스포츠와 동계스포츠가 동시에 시작된 것은 계절이 반대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호주사람들은 '럭비'라는 단어가 귓전에 스치면 자다가도 일어난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호주뿐만 아니다. 이웃한 뉴질랜드 사람들은 한술 더 뜬다. 그래서 호주와 뉴질랜드의 럭비 팬들을 일컬어 '럭비 크레이지스(rugby crazies)'라고 부른다.

"호주에 럭비와 맥주가 없었다면 혁명이 일어나도 몇 번은 일어났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호주사람들의 럭비사랑을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럭비는 미친 사람들의 놀이?

호주로 갓 이민 온 사람들은 호주에서 럭비와 크리켓이 성행하는 것을 보고 의아스럽게 생각한다. 그것도 세 가지 방식이나 되는 럭비경기에 호주사람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는 쓸쓸한 감회에 젖기도 한다.

우선 한국에서도 하는 국제식 럭비(rugby union)가 있다. 그리고 시드니에서 주로 하는 럭비리그(rugby league)와 멜버른에서 만들어진 호주식 럭비(Australian rules football)가 바로 그것들이다.

럭비경기는 노동자 계층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모으면서 호주의 국민스포츠로 성장했다. 지금은 룰에 절대 복종하는 젠틀맨 스포츠가 됐지만, 호주의 건국 초기엔 사정이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1800년대 중반의 럭비경기는 매번 응원단까지 가세한 싸움으로 끝났다고 한다. 그래서 호주를 방문한 어느 영국언론인은 호주의 럭비경기를 보도하면서 '미친 사람들의 놀이(amusement of madmen)'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식으로라도 울분을 풀어내야 하는 식민지 사람들의 신산한 삶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반면에 호주의 대표적인 하계스포츠인 크리켓 경기는 지식인 계층의 호응이 높다. 하루 종일, 혹은 사흘씩이나 계속되는 경기를 관람하면서 덤으로 햇볕과 대화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 도중에 '차 마시는 시간(tea break)'을 갖는 스포츠는 크리켓밖에 없을 것이다.

호주에서 럭비와 크리켓을 즐기는 것도 이민자의 경계를 뛰어넘는 한 가지 방법이다. 특히 호주서민들의 순박한 정서가 녹아 있는 럭비를 즐기다보면 잘 안 보이던 호주가 훤히 들여다보이기도 한다.

싸움하듯 온몸으로 부딪치지만, 경기가 끝나면 함께 홈팀 클럽하우스로 몰려가서 맥주 한 잔씩 기울이는 남자들의 세계(man's world).

콥스하버의 모텔에서 벌어진 일

지역연고를 갖고 장기 페넌트 레이스를 벌이는 호주의 럭비리그 팀 중에 캔터베리 불독(Canterbury Bulldogs)이라는 팀이 있다. 캔터베리는 호주 한인동포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캠시를 포함하는 지역이어서 불독은 한인동포들의 팬이 가장 많은 팀이다.

지난 2월, 불독 팀은 시즌 개막을 앞두고 해변관광도시인 콥스하버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매년 그곳에서 전지훈련을 하는 불독 팀은 2004년 시즌의 우승후보답게 강도 높은 훈련을 거듭했다. 그러나 장기간 가족들과 떨어져서 생활하는 선수들의 밤 시간이 문제였다.

사건은 그런 와중에 터지고 말았다. 불독 팀의 일부 선수들이 훈련장을 찾아온 한 여성을 팀 숙소인 모텔로 끌어들여 집단성폭행을 한 것. 피해여성의 증언에 의하면 무려 여섯 명의 선수들로부터 시달림을 당했다고 한다.

피해여성은 다음날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불독 선수들은 돈을 지불하고 관계를 맺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슷한 일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이 계속해서 나타나는가 하면, 한 여성은 채널9의 <60분> 프로에 출연해서 수년 전에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당했다고 증언하여 불독 선수들의 주장은 힘을 잃었다.

일부 럭비 팬들은 "성공한 운동선수들의 주변을 맴도는 철부지 여성들이 더 문제"라고 말했지만 호주여성단체들의 거센 성토를 받았을 뿐이다.

호주언론은 거의 한 달 이상 그 사건을 주요뉴스로 보도했고 럭비를 사랑하던 호주사람들의 분노는 하루가 다르게 커졌다. 마침내 경찰이 적극적인 조사에 나서 선수들의 DNA 검사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거꾸로 선 스포츠 문화

'부딪치고 넘어지고' 켄터베리 불독 팀과 시드니 루스터즈 팀의 격돌
ⓒ 오지 미디에 서비스
설상가상으로 불독 팀의 주전선수가 지난 시즌 중에 마약의 한 종류인 헤로인을 복용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팀을 초상집으로 만들었다.

불독 팀의 비극은 선수들의 파행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시즌 개막 두 번째 경기에서 불독 팀의 열성 팬들이 관중석에서 상대팀의 응원단과 집단 난투극을 벌인 것.

사태가 이쯤 되자, "호주의 잘못된 럭비문화를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된다"라는 목소리가 여기 저기에서 터져나왔다. 럭비 팬인 존 하워드 총리가 나서는가 하면, 일부 팬클럽은 한시적으로 관람을 보이콧하자는 의견을 냈다. 불독 팀의 스폰서인 미츠비시 전자는 스폰서 계약을 취소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런 판국에 호주럭비리그 국가대표팀의 주장인 데렌 노키아 선수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래된 호주의 럭비문화다. 이번에 불독 팀이 불운하게 걸려들었을 뿐"이라는 신중하지 못한 발언을 해서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

참다 못한 선배 럭비선수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호주럭비의 전설이 된 은퇴선수들이 '후배선수들의 대오각성'을 요구하고 나선 것. "스포츠 스타가 되어 거들먹거리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라는 충고를 하면서 후배선수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난파 직전까지 온 호주럭비에 대해서 선배들의 원인분석은 다음과 같다.

"요즘 선수들은 돈을 너무 많이 번다. 럭비가 TV에 의해서 상업화되기 전까지 몇몇 톱스타를 빼고는 대부분 다른 직업에 종사하면서 선수생활을 했다. 청소원에서 목수, 심지어 의사나 변호사직을 겸하는 선수도 있었다. 은퇴한 럭비선수들이 대부분 목수나 벽돌공 등의 직업을 가진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젊은 선수들이 시즌 내내 원정경기를 하다보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흐트러질 때가 있다. 팀에서 그 부분을 너무 간과한 탓이다. 선수를 상품으로 여기면서 팀의 승패에만 목을 매는 현대스포츠가 불러온 당연한 결과다."

이들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다. 시청률에 목을 매는 TV방송사의 극성스런 부추김과 극도로 상업화된 팀 매니지먼트, 게다가 운동만 잘 하면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되는 스포츠계의 풍토가 서민들의 스포츠인 호주럭비까지 병들게 만든 것이다.

자체 정화에 나선 호주럭비

호주의 럭비시즌은 이미 개막된 상태다. 그러나 각종 사건으로 얼룩진 상태의 개막이라서 어수선하기 그지없다. 호주의 모든 언론은 럭비스캔들에 대해서 '개탄' 일색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은 호주럭비리그연맹(NRL)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 성추문이나 마약복용 사실이 확인된 선수들을 영구제명한다는 것. 선수뿐만 아니라 소속팀에도 무거운 벌금과 함께 불이익을 주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불독 팀도 자체정화에 나서 같은 팀의 스타플레이어 출신인 CEO와 매니저를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경찰의 조사 결과에 따라 아무리 주전 선수일지라도 팀에서 배제시키겠다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사건 발생 후, 선수들의 행동거지도 조심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특히 시드니 루스터즈 팀의 선수들은 다운 신드롬 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을 돕는 봉사활동을 펼치기도 했고, 문제의 불독 팀도 적극적인 사회봉사활동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한국과 호주의 계절은 거꾸로 가지만 운동선수들의 멋진 플레이에 갈채를 보내는 팬들의 모습은 비슷하다. 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호주럭비는 스스로의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인간은 패배하게끔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파멸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패배 당할 순 없다'라고 말하는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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