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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최초로 투표권을 행사한 때는 1969년이다. 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마치고 논산훈련소 28교육연대로 떨어져서 연대본부에서 대기병 생활을 할 때였다.

대통령을 4년씩 두 번 할 수 있도록 한 기존 헌법을 고쳐서 세 번 할 수 있도록 하자는 박정희 정권의 개헌 발의에 대한 국민의 찬·반을 묻는 이른바 '삼선개헌 국민투표'였다.

그것과 관련해서는 지난 2001년 8월에 발표한 <1969년 삼선개헌 국민투표에 대한 기억>이라는 글에 가슴 아프면서도 재미있는 얘기를 기록했으므로 여기에서는 자세한 언급을 피하기로 한다.

내가 투표권을 갖게 된 이후 최초로 맞은 국회의원 선거는 1971년 5월 25일 시행된 제8대 총선이었다. 그때 나는 베트남의 정글 속에 있었다. 69년 10월의 삼선개헌 국민투표에 대한 우울한 기억을 가슴에 간직하게 된 나는 월남에서도 부재자 투표를 하게 될지, 하게 된다면 어떤 방식으로 하게 될지, 일단은 기대와 호기심을 가졌다.

월남에서도 69년 10월의 삼선개헌 국민투표 때처럼 공개투표를 하게 되더라도, 또다시 용기를 잃지 않고 양심에 따라 소신 투표를 하리라고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투표를 할 수가 없었다. 아예 부재자투표라는 것을 부대 전체가 하지 않았다. 그 무렵 대규모 작전을 하게 된 탓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훗날 생각이지만, 아마도 부재자 투표 시기에 맞춰 대규모 작전을 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투표권을 갖게 된 이후 국회의원 선거로는 최초로 맞은 제8대 총선에는 이처럼 월남 땅에서 참여해 보지도 못했다.

한편으로는 월남 땅에서 제8대 총선 결과를 접하며 흥분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기분이 좋다. 8대 총선에서는 야당 후보들의 약진이 있었다. 우리 고장에서는 민주공화당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서울과 전국 각지에서 많은 수의 야당 후보들이 당선돼 박정희 정권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8대 총선의 그런 결과가 박정희에게 어떤 불안감을 안겨주면서 영구집권 의지를 더욱 충동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야당이 집권여당을, 국회가 행정부를 효율적으로 견제하며 국정 균형을 이루어나가던 상황에서 박정희는 이듬해인 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하여 종신집권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그 후 나는 유신과 5공 등 군사독재 권력에 의해 민주주의가 철저히 유린된 시대를 살면서 국회에 좀더 희망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기에 치러진 총선 때마다 독재정권에 조금이라도 맞설 수 있는 인물을 국회로 보내기 위해 내 나름껏 비좁은 생활 반경 안에서나마 최선을 다했다. 대통령이 체육관을 빌어 자신이 자신을 뽑는 상황에서는 국회의원을 뽑는 투표만이 국민인 나의 유일한 주권 행사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지역들에 비해 우리 지역에서는 야당 후보들이 비교적 많이 당선되었던 사실을 나는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5공 전두환 정권에 가장 강력하게 맞섰던 걸출한 정치인인 한영수씨가 유신 시절에 처음 국회에 진출한 뒤 5선의 관록을 쌓은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지난 1992년의 제14대 총선 때는 집권여당인 민자당이 대승을 했다. 제13대 국회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4개 원내 교섭단체로 이루어지고 또 특이하게 여소야대의 형국이 되자 당시 대통령 노태우는 자신의 민정당과 김영삼의 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등 원내 3개 정당을 하나로 통합하여 민자당이라는 거대 여당을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14대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것이었다.

그런 판국에서도 우리 서산·태안 지역은 야당 후보를 당선시켰다. 민자당이 충청도 지역도 석권하다시피 한 가운데 유일하게 우리 지역만이 야당 후보를 당선시켰으니, 생각하면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14대 총선의 개표가 완료되어 가던 3월 25일 아침, 부산의 한 여성작가로부터 받은 전화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지 선생님 사시는 그 동네, 차암 멋진 동네네에." 그때처럼 내 고장이 자랑스럽게 느껴진 때는 없었다.

1996년의 제15대 총선은 내게 가장 큰 아픔을 안겨준 선거였다. 어쩌면 내 평생 동안 가장 잊혀지지 않는 선거가 될 것 같다.

나는 전 해인 1995년의 지방선거 때부터 자민련에 의한 '신지역감정' 바람의 엄청난 위력을 온 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미 그 해부터 충청도의 자민련 바람, 그 지역감정의 유령과 처절하게 싸움을 하고 있었다.

지방선거 이전부터 내가 관여하고 있던 지역신문 <새너울>, 지역잡지 <갯마을>, 그리고 <태안신문> 등 지역언론 매체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지역감정 바람의 정체와 어리석음을 적시하곤 했다.

그것에 대한 역풍 또한 만만치 않았다. 내 글을 내보낸 지역언론 매체들에는 항의 전화가 빗발쳤고, 나는 집에 앉아서도 전화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법이니, 아예 충청도를 떠나 살라는 말도 무수히 들었다.

나는 제15대 총선 때는 더욱 강해진 지역감정 바람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충청도의 신지역감정이 사람들을 얼마나 몰이성적으로 만드는가를 절절히 체감하며 비애와 절망에 젖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15대 총선 결과는 명확한 지역 구도로 나타났다. 우리 지역 역시 자민련의 아성이 되어버렸다. 나는 야당이 아닌 집권 신한국당의 후보를 당선시킨, 즉 자민련 후보가 당선되지 못한 유일한 선거구인 홍성·청양 지역이 되레 부러울 지경이었다. 4년 전인 92년의 제14대 총선에서 충청도에서는 유일하게 야당 후보를 당선시킨 우리 고장이 그 멋진 정치의식을 어디다 팽개쳐 버렸는지 참으로 안타깝고도 실망스러웠다.

그때 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두고 보아라. 충청도의 지역감정은 10년을 가지 못한다. 이 위세가 10년을 넘긴다면 내 두 손에 장을 지지겠다.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몰라도 충청도의 신지역감정은 10년 안에 자연 소멸이 될 것이다."

대중이 뭔가를 느끼고 깨닫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린다. 대중보다 뭔가를 먼저 깨닫는 사람은 주변으로부터 이해 받지 못하는 만큼 삶이나 심정이 고달프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중이 뒤늦게나마 뭔가를 깨닫고 변화의 조짐을 보이는 것을 감지하는 기쁨 또한 적지 않다. 지금 충청도 지방이 그런 도정에 있다. 충청도 사람들은 약 10년 전부터 몇 년 동안 참으로 강성하게 온 지역을 휘어잡았던 지역감정 바람의 허무맹랑한 정체를, 그것의 부당함과 어리석음을 확실하게 깨닫고 있다. 멀지 않은 그 과거를 반성하고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많다.

그리하여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충청도 지방은 이미 미망(迷妄)의 지역감정을 확실하게 극복했다고…!

여기에서 나는 호남인들의 고도의 정치의식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우리 시대에 지역구도를 깨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명제인지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 자신들부터 스스로 지역구도를 깨기 위해 놀라운 슬기를 발휘하고 있다.

일부 경상도 지방을 옭아매고 있는 영남 지역주의의 극복은 앞으로 좀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경상도 지방에서 좀더 명확하게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박정희 향수'는 지역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다. 박정희 향수가 아직은 작용을 하는 만큼 패권주의가 결부되는 영남의 지역주의는 얼마간 더 효력이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영남 지역주의의 효력은 그대로 낮은 정치의식의 천박성을 노정하는 것이기에 그 길이만큼 훗날 역사의 눈앞에서는 불명예와 부끄러움이 더욱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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