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포가도는 경북 지방에서 보기 힘든 넓은 평야 사이를 가로 질러 난 길이다. 바다를 향해 꺾임 없이 길게 이어진 2차선 도로를 달리는 것이 그렇게 시원할 수 없다. 이 길을 따라 6km쯤 가다 보면 왼쪽 언덕에 늠름한 감은사지 동서쌍탑이 보인다.
경주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 중의 명소가 바로 감은사터다. 삼국 통일을 이루고 죽어서까지 용이 돼 신라를 지켰다는 문무왕의 전설이 깃든 곳이 바로 이 곳이다. 금당 아래에 빈 공간을 두어 용이 된 문무왕이 쉬어 가도록 했다는 전설은 너무나 유명하다.
감은사터 동서쌍탑(국보 제112호)의 명성은 이미 수많은 전문가들에 의해 확인된 바 있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는 이 탑에 대해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건축 양식인 삼층석탑의 원형이고, 하늘을 찌를 듯한 상승감과 어떤 변괴에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안정감을 동시에 구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어지럽던 삼국시대를 신라의 이름으로 통일한 이후, 밖으로는 하나된 국력을 끝없이 과시하려고 하고, 안으로는 삼국통일의 초기에 안정된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염원이 감은사터 동서쌍탑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새로운 석탑 양식으로 자리매김한 삼층석탑 양식은 이곳 감은사터 동서쌍탑에서 시작됐고, 이후 통일신라의 모든 석탑 양식에 적용된다.
감은사가 세워졌을 당시 절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 왔다고 한다. 신라인들은 배를 타고 와 감은사를 참배했다고 하는데 절터 앞에는 배를 댔다는 선착장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선착장이 무너지지 않도록 큰 돌못을 곳곳에 박아 놓았다.
선착장에서 감은사터까지의 가파른 언덕이 불국사로 치면 청운교와 백운교였고, 참배객들은 이 언덕을 올라 중문을 지나 동서쌍탑을 보고 금당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불국사에서도 볼 수 있는 이 같은 가람 배치 양식이 처음 시도된 것이 바로 감은사라고 한다.
감은사터에 온 김에 근처의 이견대(사적 제159호)와 대왕암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 보이는 이견대는 1970년 발굴된 초석을 근거로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예스런 분위기는 느낄 수 없지만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세상의 파란을 없애고 평안하게 만드는 보물, '만파식적'을 얻은 곳이라는 전설이 있어 흥미롭다. 멀리 보이는 대왕암에도 죽어 용이 돼 나라를 지켰다는 문무왕의 전설이 어려 있다.
문화유적을 답사하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지만, 보는 것에만 그친다면 자칫 지루해지기 쉽다. 하지만 그 유적에 얽힌 옛날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알고 본다면 지루함은 금세 흥미로 바뀐다.
유적마다 세워진 안내판에 적혀 있는 내용은 하나같이 객관적인 사실의 나열이니 지루함의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오히려 전설이든 민담이든 야사 속의 한 구절이든 그 유적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안내판에 적어 놓는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