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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김이 보낸 친필 서신
로버트 김이 보낸 친필 서신 ⓒ 김범태
"D - 100. 동포애가 나를 지켜 준 원동력이 되었다.”

국가기밀누설혐의로 미국 정부에 체포돼 9년형을 언도받고 수감 중인 로버트 김(64·한국명 김채곤)이 우리 시간으로 17일 출소 100일을 앞두고 한국 국민들에게 “여러분의 사랑과 성원에 보답하고자 모든 힘을 다할 것”이라는 내용의 가슴 저린 인사를 전해 왔다.

로버트 김은 기자와 가진 팩스 인터뷰에서 “가족과 떨어져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잘 견뎌올 수 있었던 것은 국민들의 관심과 사랑 때문이었다”며 “이러한 동포애가 없었다면 지금 내 자신의 존재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고 고백했다.

A4 용지 다섯 장 분량으로 보내온 이 친필 편지에는 그의 최근 심경이 절절이 묻어있다. 로버트 김은 출소 100일을 앞두고 “앞으로 나에게 닥칠 법적 제약과 제한 때문에 그전보다 더 긴장이 된다”면서 “출소 후 내가 해야 할 여러 가지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생각하느라 한시도 평안할 때가 없다”고 현실적 고뇌를 내비쳤다.

또 “대인관계를 배우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며 사회적응을 위한 훈련에도 힘을 쏟고 있음을 전했다. 실제로 그는 최근 한국인이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사회적응을 위한 시간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석방 후 계획도 서서히 밑그림을 그려가고 있다. 그는 “출소 후 일년 동안 아무 사고가 없으면 보호관찰 기간을 없애달라고 탄원할 수 있다”며 이 탄원서의 초안을 벌써 작성해 놓고 있다고 전했다.

로버트 김은 이어 “한국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고 있다”면서 고국에서의 활동을 준비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그는 “우리나라를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때묻지 않은 젊은이들을 잘 길러내야 한다”며 ‘나무’를 심고 재목으로 길러내는 일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는 운동시설이나 식당이 없어 침실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등 열악한 교도소 환경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가족과의 면회 역시 짧은 시간동안, 여러 사람과 함께 진행되는 등 연방 형무소와 다른 형편으로 인한 어려움을 호소했다.

잉크펜을 소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감옥의 규칙에 따라 몽당연필로 써내려간 이 편지에서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건 한국인으로서 조국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한국인이기에 한 일이었고, 지금도 후회는 없다”며 초심을 재확인했다.

“앞으로 닥칠 제약에 긴장…한국 알려고 노력”
로버트 김 "나무 심는 마음으로 젊은 재목 길러내고파"

▲ 로버트 김
-고국의 국민들께 인사를 전한다면?
"1996년부터 가족과 떨어져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잘 견뎌온 것은 많은 국민들의 관심과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주신 분들의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동포애가 없었다면 지금 내 자신의 존재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감사드리며, 이에 보답하고자 모든 힘을 다할 것이다.

고국의 실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모르나 여러분들의 진정한 협조만 있다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여러 방면으로 도와주신 국민들께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계속 관심 갖고 도와주시기 바란다."

- 출소를 100일 앞둔 현재의 심경은.
"앞으로 나에게 닥칠 법적 제약과 제한 때문에 그전보다 더 긴장이 된다. 그리고 출소 후에 내가 해야 할 여러 가지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생각하느라 한시도 평안할 때가 없다. 지난 7년반 동안 의식주는 해결되었으나, 앞으로는 내가 해결해야 할 것들이고, 지금까지 관심을 가져주신 여러 국민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건강은 어떤가.
"나이에 비해 매우 건강한 편이다. 이 건강이 하나님께서 나를 계속 쓰시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이에 보답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사회적응을 위한 훈련은 어떻게 하고 있나.
"대인관계를 배우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과거 몇 년 동안의 대인관계는 모두 간수와 수감자들이었지만 지금은 일반 시민들과 실제 돈을 만져보고, 돈을 써야 하는 행동이나 말하는 것에 주의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고 있다."

-앨런우드에서 윈체스터로 이동하면서 "한국인이기에 한 일이다. 지금도 후회는 없다"고 했는데, 지금도 같은 생각인가.
" 이감 당시 전화로 말씀드린 것은 나의 진정한 마음이었으며, 지금도 그 말은 나의 지론이다. 어떠한 상황에서건 한국인으로서 조국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앨런우드에서 윈체스터로 이동한 후에 많은 혼란을 겪었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은 정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나.
"나는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나, 나를 바라보는 견해가 어떤지는 모르겠다."

-이전 앨런우드에서는 "간수들의 보이지 않는 압박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고 했는데, 윈체스터의 경우는 어떤가.
"내가 재판받던 버지니아 지방법원은 미국 남부에 속해있는 관계로 나처럼 사회적응을 훈련을 시킬 시설이 없어서 지방 감옥소의 주말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시키고 있다. 때문에 나는 지방 범죄인들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 그래서 연방 수인으로 매우 부적절한 대우를 받고 있다. 운동시설이 없고, 식당이 없어 침실이 이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더욱이 가족과의 면회 내지는 대화가 연방 형무소와 너무나 달라 열악하다."

-그토록 기다리던 아버지를 뵙지 못하고 옥중에서 장례식 사진을 대신 보는 것으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최근에는 49제에 참석하도록 애썼지만 이마저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어떤 말씀을 드리고 싶나.
"아버지께서 나의 출감을 학수고대하시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매우 마음 아팠다. 집에서 보내준 아버지 서거의 신문기사들을 읽으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무언으로 보여주신 ‘선공후사’의 행적을 파노라마처럼 다시 볼 수가 있었다.

나를 향해 미소 짓는 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나면서 그를 향한 그리움이 눈물을 샘솟게 했다. 조금만 더 오래 사셨으면 내가 못다한 효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안타까워했다. 나의 불효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 "

-석방 후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어떤 일이며, 왜 그 일을 하고 싶나.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지금까지 나를 위해 희생해 온 가족들에게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겠고, 나아가서는 우리 나라를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나라로 만들려고 때묻지 않은 젊은이들을 잘 길러내려고 한다.

우리 모든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이 제대로 교육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나무(젊은이)’들을 심어서 기른 후에 재목으로 길러내는 일을 하고 싶다."

-앞으로 법적 절차는.
" 출소 후 3년간 보호관찰기간이 남아있다. 이 기간동안은 보이지 않는 끈에 매여 모든 행동에 자유가 없어 매우 불편하며 조심해야 한다. 이 동안에 조금이라도 법을 어기게 되면 다시 연방교도소로 가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출소 후 일년 동안 아무 사고가 없으면 내가 선고 받은 판사에게 남은 보호관찰 기간을 없애달라고 탄원할 수 있다. 나는 이 탄원서 초안을 벌써 작성해 놓고 있으며, 출소 일년 후에 이를 보완해 제출하려고 한다. 내가 완전히 보호관찰에서 자유로워질 때 사면국에 탄원서를 내야 한다. 그러나 보호관찰 기간이 지나면 여행은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고국의 국민들에게 하고픈 말씀은.
"나는 모든 국민들이 나의 행동을 정당화 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더러는 나를 원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이 나의 행동을 잘 봐 주시기 때문에 지금까지 좌절하지 않고, 또 용기 잃지 않고 살아 올 수 있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특히 바쁘신 중에도 편지를 써 주시고, 생활에 보탬을 주신 여러분들께 이 기회를 통해 다시 감사드린다. 여러분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내가 있게 되었으며, 앞으로도 여러분들의 끊임없는 성원으로 부족하지만 용기를 가지고 타인을 위해 살려고 한다.

때 묻지 않은 젊은이들을 잘 길러 우리 나라가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나라가 되는데 재목으로 삼고 싶다. 잉크펜을 못 갖게 하는 이 감옥의 규칙에 따라 몽당연필로 쓴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하다.

4월 13일 윈체스터 교도소에서
로버트 김채곤 / 김범태 옮김

“국회의원은 국민의 봉사자…국회 쇄신에 힘쓰길”
로버트 김 옥중에서 동생 김성곤 당선자에 서신 조언

▲ 로버트 김과 동생 김성곤(앞줄 좌측) 당선자
로버트 김은 부인 장명희씨를 통해 옥중에서 동생의 국회의원 당선 소식을 들었다. 이번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여수 갑 지역구에서 당선된 김성곤(51) 씨가 그의 친동생이다.

로버트 김은 기자와 가진 팩스 인터뷰에서 15대 국회에 이어 다시 의정활동에 나서게 된 동생에게 “국민들로부터 신뢰받고 존경받는 대표자들이 될 수 있도록 국회를 쇄신하는데 힘쓰라”고 조언했다.

총선 이전인 지난 13일자로 보낸 서신에서 로버트 김은 “만약 동생이 당선되면 어떤 말을 전하고 싶냐”는 질문에 “당리당략을 초월해 오직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라”고 가슴에 묻어두었던 말을 꺼냈다.

로버트 김은 “동생과 나는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를 다닌 동문으로, 매우 가깝게 지내왔다”면서 “그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경제적으로는 도움을 줄 수 없었지만, 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정신적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추억했다.

또 “그는 정의롭고 양심적이며,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 일꾼임을 잘 안다”고 특별한 신뢰를 보이며 “국회의원은 국민의 봉사자로서 국민과 국가를 위해서만 일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동생도 “득표수의 30% 정도를 형님의 몫으로 본다”는 말로 이역만리 옥중의 형에게 감사를 표했다. 김성곤 당선자는 “형수님으로부터 당선소식을 전해 듣고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씀을 들었다”며 “출감 이후 생활대책과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김 당선자는 “8년 전만 해도 이 긴 세월을 어떻게 보내나 했는데 벌써 카운트다운 시간이 되었다”면서 상봉을 학수고대했다. 그는 “새롭게 시작되는 의정활동으로 바쁜 시간이 되겠지만 형님의 출감에 즈음해서 미국에 다녀올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91세로 지난 2월 타계한 부친 김상영 옹도 8, 9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바 있어 부자가 모두 국회의원을 2번씩 하는 기록을 갖게 됐다. / 김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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