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청 동천천사를 알리는 이정표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백률사(栢栗寺)란 안내판이 있다. 이 곳이 바로 소금강산 입구다. 나무 계단을 따라 200여m 미터를 올라가면 백률사가 있다. 이 절은 법흥왕 14년(527년), 불교의 전파를 위해 순교한 이차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절이라 전해지고 있다.
이차돈이 순교할 때, 그의 목에서 흰 피가 흘렀고, 하늘 높이 솟구친 그의 머리가 소금강산에 떨어져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이차돈을 기렸다는 것이다.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천지가 진동하는 등 신비한 일들이 일어나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게 됐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처럼 큰 의미를 지닌 절이지만, 지금은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 몇개만 남아 있다. 대웅전도 다른 절과는 달리 그리 큰 규모가 아니다.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지만, 불국사, 석굴암 등 대찰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절이다. 건립 당시에는 이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고 하지만, 임진왜란때 대부분 소실되고 이후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백률사에서 출토된 금동약사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 최대의 금동불상으로 유명하다. 179cm의 키와 나무랄 데 없는 인체비례 등 지극히 사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국보 제28호인 이 불상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와 함께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신라 최고의 명필 김생이 비문을 썼다고 알려지는 이차돈 순교비도 소장돼 있다. 이 순교비는 이차돈이 순교할 때의 모습을 담은 그림과 당시의 상황이 묘사된 비문 등이 새겨져 있는 육면의 공양비다.
백률사 대웅전 뒤로 좁은 등산로가 나 있다. 이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곧 정상이다. 정상에서는 경주 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 조그만 망원경이라도 하나 있다면, 경주시 구석구석을 자세하게 돌아 볼 수 있다. 멀리 유채꽃이 만발해 있는 박물관도 보이고, 푸른 수풀이 우거진 대릉원도 보인다.
정상에서 북쪽으로 50여m 내려가면 삼존마애불좌상(유형문화재 재194호)이 있다. 세 분의 부처님이 너른 바위면에 얕게 새겨져 있다. 마모가 심해 자세히 보지 않으면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이곳 삼존마애불좌상을 거쳐 정상까지 이르는 등산로는 경주시민들에게 꽤 인기있는 등산코스라 한다. 정상에 간단한 체육시설도 갖추고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찾을 수 있는 곳이다.
백률사로 통하는 돌계단이 시작되는 곳에 있는 굴불사터 사면석불(보물 제121호)까지 본다면 소금강산 일대의 유적은 거의 다 본 셈이다. 백률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쉽게 볼 수 없는 사방석불(四方石佛)의 형태라 눈길을 끈다.
굴불사터는 신라 35대 경덕왕 때 세워졌다고 한다. 왕이 나들이 도중 이 근처를 지나는데 땅에서 스님의 경 읽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 신하에게 그 곳을 파보라고 명했다. 땅을 파보니 사방에 불상이 새겨진 바위가 나왔는데 이에 감동한 왕이 그 자리에 절을 짓고 석불을 파냈다는 의미에서 굴불사라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 절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사방불상만 남았다.
아미타불, 약사여래, 석가모니불, 미륵불 등 네 분의 부처님과 관세음보살 등 여러 보살들을 한번에 볼 수 있다. 이 중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는 손의 인(印)과 약합 등으로 알 수 있지만 다른 두 분의 부처님은 마모가 심해 판별이 어려운 것이 아쉽다.
이차돈의 순교 이후 신라는 불교를 국교로 삼아 온 나라를 부처님의 공덕 아래 두고자 했다. 저 유명한 '불국사(佛國寺)'도 온 나라를 불국토, 즉 부처님의 땅으로 만들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바람이 담긴 절이 아니던가.
백률사는 이차돈의 공적과 넋을 기리고자 세운 절인 만큼 경주를 여행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또, 백률사가 있는 소금강산 역시 신라 오악 중 하나인 북악으로 불리우는 명산이었기에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까운 곳이다.
높지 않은 산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올라 아담하고 조용한 산사를 둘러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가볍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인 만큼 보고 느끼는 것도 많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