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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라크 수니파 게릴라가 8일 바그다드 서부 외곽 아부 그리브에서 미군 차량에 공격을 가한 현장에서 AK47소총을 높이 흔들며 승리를 자축하고있다.
한 이라크 수니파 게릴라가 8일 바그다드 서부 외곽 아부 그리브에서 미군 차량에 공격을 가한 현장에서 AK47소총을 높이 흔들며 승리를 자축하고있다. ⓒ AP=연합뉴스

"이라크 파병 철회는 이제 정치적 결단의 문제다. 지난해 10월 내가 현지조사단으로 이라크에 갔을 때만 해도 주 개념은 '이라크 안정화'였지만 지금은 전쟁으로 전환되는 단계다. 대통령이나 정치 지도자들은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한국군 파병 예정지였던 이라크 북부 모술의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평가해 '양심 선언'을 했다는 평가까지 받았던 박건영 가톨릭대 교수의 말이다. 실제 그의 말대로 이라크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지난해 9월 초 미국이 이라크 추가 파병을 요청했을 때만 해도 치안이 혼란한 지역은 팔루자-바쿠바 등 수니삼각지일 뿐 다른 지역은 상대적으로 괜찮다는 게 정부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말 치안 혼란은 이라크 북부로 번졌고 올 4월 들어서는 이라크 중남부에서 강경 시아파 지도자 무크타다 알-사드르의 추종세력이 전면 항쟁에 나섰다.

이전에는 '치안 불안'이었지만 이제는 '제2의 이라크 전쟁'이다. 4월들어 지난 19일까지 작전 중 사망한 미군 숫자는 100명으로 지난해 3월 이라크 전쟁이 한창일 때보다 더 많다.

이라크만 전쟁터가 된 것은 아니다. 지난 달 11일 강력한 전쟁 지지국이자 이라크에 1300여명의 병력을 보냈던 스페인은 알-카에다로 추정되는 세력의 공격을 받았다. 수도 마드리드 4곳에서 발생한 폭탄테러로 모두 190여명이 숨지고 1600여명이 다쳤다. 이 때문에 지난달 14일 스페인 총선에서 애초 승리가 예상됐던 집권 국민당은 이라크 전쟁과 파병에 반대했던 야당 사회노동당에게 역전패했다.

스페인이 이미 철군에 돌입했고 온두라스와 도미니카도 뒤를 따르고 있다. 미국과 영국 주도의 동맹군 체제가 붕괴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전쟁터에서 무슨 재건 지원인가

이처럼 상황이 계속 악화되는데 정부를 비롯한 정치권의 대응은 안이했다. 애초 파병 이유 가운데 하나로 내걸었던 것이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었다. 그러나 조지 부시 행정부의 강경 자세로 6자회담이 2번이나 열렸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오히려 최근에는 파키스탄의 칸 박사가 5년 전 북한에서 핵무기를 봤다는 보도가 흘러나오는 등 전망은 더욱 어두워졌다. 올 상반기에 열기로 했던 3차 6자회담 일정을 잡기는 커녕 '실무그룹' 회의마저 열리지않고있다.

이라크 재건 지원이라는 파병 목적도 실행하기 힘들다. 올 2월 국회를 통과한 파병안 자체가 이미 전투병 파병일 뿐 아니라, 이라크 전역이 전쟁터가 된 상황에서 재건 지원을 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이라크에 진출한 외국 기업 종사자들이 납치되거나 살해당하면서 외국인들이 빠져나가 복구작업이 거의 중단된 상태다.

정부의 파병지역도 모술에서 키루쿠크로, 다시 쿠르드족 자치지역으로 변경됐다. 정부는 "파병이 늦어지면 파병 효과가 소멸된다"며 지난 2월 파병안의 국회 통과를 부탁했으나 이제는 6월 초로 늦춰졌다. "이러다가 '자이툰 부대'(이라크 파병 부대의 이름)가 '실미도 부대'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개 소리가 나올 정도다.

지난 3월 초 파병 지역으로 예고된 쿠르드족 자치지역도 문제가 많다. 쿠르드 자치주 지역은 최악의 선택이라는게 많은 중동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 지역은 지난 1991년 걸프전 이후 비행금지구역으로 지정된 뒤 쿠르드족이 자치를 펼쳤다. 이라크 전쟁으로 아무 피해를 입지 않았다. 재건지원 수요가 거의 없다는 말이다.

쿠르드족 자치지역에 파병하는 것은 더 큰 문제

쿠르드족은 소수민족으로 일반 이라크 국민들과는 매우 불편한 갈등 관계에 있다. 이 지역에 간다면 쿠르드족의 독립을 지원하는 것처럼 보여 다른 이라크인은 물론 주변 중동 국가들과 갈등을 빚을 수 있다.

쿠르드 자치지역은 친미적이어서 주둔하고 있는 미군 숫자가 수백여명에 불과하다. 여기에 3600여명의 한국군이 간다면 되려 반미 급진세력들의 새로운 공격 목표가 될 수 있다. 이 지역은 아랍어보다는 쿠르드어 사용지역이다. 아랍어 통역요원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한국군이 쿠르드어 전문가를 언제 발굴해 교육을 시킬 것인가?

정부가 말했던 목표를 달성할 수도 없고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면 안 가면 된다. 불가능한 상황에서 꼭 가야겠다고 우기는 것 자체가 전 세계적인 웃음거리다. 터키는 지난해 10월 수십억달러의 원조를 받는 대가로 1만명의 전투병을 이라크에 보내기로 했다가 상황이 달라지자 철회했다.

박건영 교수는 이렇게 강조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국이 공격을 받았을 때 한국이 도와주는 것이지 미국이 침략했는데 한국이 도와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 군이 옛날 냉전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이 원하면 우리는 가야하는 것이 바로 한미동맹이라는 식의 강박관념이 강하다. 이런 식이라면 미국이 저지른 전쟁에 한국은 늘 파병해야 한다는 말이다.

파병을 철회하면 국제적인 신인도가 떨어진다고 할텐데 이는 국제적인 신뢰 문제가 아니라 미국 정부와의 관계다. 국제 사회에 대한 신인도로 확대해석할 필요가 없다. 스페인 사례에서 보듯이 미국에 대한 신뢰도 중요하지만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 지도자들의 권위를 더 존중받게 할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이 열린우리당의 태도다.

지난 2월 전투병 파병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당론으로 파병안에 찬성한 것이 큰 계기가 됐다. 원래 한나라당 의원을 비롯해 개별적으로 파병안에 찬성하던 의원 숫자만으로 이전부터 파병안 통과는 가능했다.

핵심은 다수여당인 열린우리당의 태도

그러나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이 먼저 당론을 정해야 한다"며 파병안 통과를 강행하지 않았다. 한나라당이 파병안 통과에 앞장설 경우 이미지만 나빠진다. 무엇보다 나중에 사고라도 나면 "한나라당이 파병안을 강행했기 때문"는 비판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전투병 파병으로 인한 사후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당론으로 파병안에 찬성하자 한나라당은 홀가분해졌고 파병안은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한나라당과 자민련이 '파병반대 전선'을 통과할 때 '사후 책임에 대한 부담감'이라는 '지뢰밭'을 없애는 '전투공병' 노릇을 한 게 열린우리당의 '파병안 찬성'이다.

새 국회는 파병안을 철회하기에 좋은 조건이다. 현재 299명의 국회 의석 가운데 열린우리당이 152석, 민주노동당이 10석, 민주당이 9석이다. 이들의 의석 점유율은 57%다. 민주노동당은 물론 민주당도 선거운동 과정에서 파병을 원점에서 재검토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열린우리당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들 정당과 협조해 파병안 철회를 충분히 주도할 수 있다.

참여정부의 지지율이 폭락하고 '개혁 실종'이라는 비판에 꼭 나오는 변명이 있다. "거대 야당과 조중동 등 거대 야당의 끊임없는 딴지 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수구야당의 딴지 때문에 시행하지 못한 '개혁' 정책이나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개혁' 법안이 몇개나 있는지 의문이다. 오히려 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것도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라크 전투병 파병이다.

지난해 말 참여정부의 1년을 평가할 때 '우왕좌왕'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러나 한 대북문제 전문가는 "우왕좌왕이 아니라 좌충우돌이다, 정책의 일관성이 없다보니 좌파와 충돌하고 우파와 충돌했다"고 촌평했다. 그러나 좀 더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말이나 분위기는 왼쪽 편향인데 실제 행동은 항상 우편향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자동차에 비유하면 왼쪽 깜박이를 켠채 항상 우회전만 했다는 말이다.

17대 국회는 이전 국회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개혁적으로 변했다는 평가가 많다. 전대협 출신만으로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새 국회가 개혁적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시금석이 바로 이라크 파병안 철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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