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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교 지에서 바라본 반월성 뒷편
월정교 지에서 바라본 반월성 뒷편 ⓒ 황정현
신라 최대의 돌다리라 할 수 있는 월정교와 일정교가 복원된다고 한다. 경주시가 반월성과 첨성대, 황남고분군 등 문화재 밀집지역인 동부사적지 종합정비계획 수립에 나섰다고 한다. 이와 연계해 경주시는 내년부터 월정교와 일정교 복원작업에 들어가 고속철이 개통되는 오는 2008년에 복원을 마칠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복원이 반드시 능사는 아니겠지만 이참에서 신라의 놀라운 토목기술을 엿볼 수 있는 월정교를 둘러보았다.

분황사를 거쳐 안압지와 반월성 그리고 그 옆으로 계림과 첨성대, 천마총까지. 월정교를 찾아가는 길은 신라의 진수를 그대로 더듬어 가는 것 같아서 긴장감이 섞인 기대감마저 들었다.

국립경주박물관 서쪽으로 난 사잇길을 따라 약 100여미터 들어가니 발굴된 채로 나란히 줄지어 누워있는 돌들. 그리고 그 맞은편으로 교대가 보였다.

혹자는 무지개다리라고도 하고 혹자는 초호화 지붕을 드리운 목재평교라고도 하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신라의 월정교라고 하기에는 세월의 무상함이 너무 크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옛 신라 영화의 흔적처럼 교각을 받쳤을 기초석이 남천(南川, 문천이라고도 한다)의 물살을 물리치고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1986년 발굴된 월정교는 국립경주박물관 앞에 위치해 있는 일정교와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다리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경덕왕 19년(760) 궁남 문천상에 월정․춘양 두 다리를 놓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일정교가 춘양교로 불리었음을 알 수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표기가 일정교로 되어 있어 조선시대부터 명칭이 바뀐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월정교가 있었던 반월성 남쪽면은 다른 쪽과 달리 가파르고 높아 성벽을 대신해 남천이 방패 구실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다리가 있어야 하는 법.

더욱이 17만호가 살았다는 당시 신라의 수도 경주에는 통일대국답게 외국 사신들의 왕래도 잦았을 터이고 왕궁인 반월성의 위상을 한층 높여줄 이음새가 필요했으리라. 월정교와 일정교는 그 연유로 세워졌던 듯 하다.

월정교 기초석. 멀리 보이는 곳이 도당산이다.  기초석은 억새의 흔들림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긴 천년의 세월을 제 모습대로 버텨 왔을 것이다.
월정교 기초석. 멀리 보이는 곳이 도당산이다. 기초석은 억새의 흔들림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긴 천년의 세월을 제 모습대로 버텨 왔을 것이다. ⓒ 권미강
8세기경 중국을 비롯한 일본, 발해 등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왕경건설의 붐이 일고 있었다. 이 무렵, 신라도 서라벌을 왕경도시로 건설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으며 황룡사를 중심으로 한 왕경도시는 월정교를 건설함으로서 그 결실을 보게 된다. 월정교가 곧 신라왕경의 결정체가 되는 셈이다.

이는 황룡사지와 반월성 주변에서 발굴된 초대형도로와 고관대작의 집터, 각종 왕경 관련 유물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월정교는 이외에도 신라인들에게 또 다른 의미로 작용했던 듯싶다.

신라인들의 성지라고도 일컬어지는 남산. 월정교는 바로 그 남산으로 가는 길목이다. 또한 건국 초기부터 화백회의가 열리고 국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도당산도 월정교를 통해야 갈 수 있는 곳.

결국 월정교는 왕과 귀족은 물론 많은 신라인들이 남천을 건너 성지로 가는 중요한 다리이다. 신라인들이 불국정토라고 부르는 극락의 세계 남산으로 가는 첫 관문인 것이다.

고려의 시인 김극기에 의해 시로도 승화되었던 월정교는(김극기 시에서는 월정교를 무지개다리로 표현했다) ‘다리 전체길이 60.57m, 각 교각과 교각 사이의 중심간 거리 12.55m, 교대지와 교각지 사이 11.46m였던 것으로 발굴 당시 조사됐으며 4개의 교각과 그 위에는 목재평교가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교각은 유수방향 양쪽에 수압을 분산시키기 위해 선수형 물가름돌을 놓고, 장대석을 잇대어 놓아 전체적으로 볼 때 배밑바닥 모양을 하고 있다.

물가름돌과 장대석 등의 연결부분에는 은장을 박아 석부재를 결구했다. 교대는 교대 양측면의 날개벽 석축보다 약간 돌출되게 하여 큰 기초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퇴물림하여 장대석을 쌓아 올렸다. 중간 중간에 돌못을 박아 석축을 견고히 했다.’(이상준의 논문 ‘월성과 그 주변유물의 이해’에서 발췌)


정말 놀라운 토목기술이다. 현재의 다리 건설보다도 어쩌면 더 견고하고 과학적인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일정교도 교각만 3개일 뿐 그 공법은 월정교와 같다고 한다. 이 두 다리는 신라 토목기술의 백미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듯싶다.

기초석 주변에는 월정교 일부분이었을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기초석 주변에는 월정교 일부분이었을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 권미강
신라 원효대사가 물에 빠지는 바람에 요석궁에서 요석공주와 하룻밤을 보내고 설총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는 유교라는 설도 간직하고 있는 월정교.

수많은 사람들이 다녔을 흔적은 이제 돌무더기의 회한으로 밖에 느끼지 못하지만 월정교는 분명 통행만이 아닌 정신적 소통마저 이뤄낸 신라인들의 지혜로 남아있으리라.

*찾아가는 길
경주시내에서 불국사 방면(울산방면) 버스를 타고 국립경주박물관 앞에서 하차한 후 반월성터와 박물관 서쪽 사잇길을 따라 남천을 거슬러 조금만 가다보면 월성교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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