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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안보'는 영어로 시큐리티(security)로 번역된다. 학계에서는 1648년 웨스트팔렌 조약의 체결과 함께 국제관계의 근대적 시스템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주도적인데, 이는 웨스트팔렌 조약의 체결이, 국가영토와 주권의 개념에 기반한 국제사회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국제관계에서 안보의 개념은 당연히 주권과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권력의 행사라는 의미를 갖게 됐다. 국가는 주권과 영토를 보호하고 국민들을 안전하게 살게 하기 위한 의무를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인적자원을 징발하는 데에 있어 국민의 의무로 주어지는 것이 바로 징병제이다. 특히나 식민지 전쟁의 틈바구니, 그리고 1,2차 세계대전과 냉전 등 대전쟁의 시기를 거치면서, 안보라는 개념은 국가안보라는 개념과 동일시되어지는 역사적 경험을 겪게 된다.

하지만 냉전의 해체, 소규모 내전의 끊임없는 발발, 인종분쟁 등의 새로운 분쟁양상은 안보라는 개념에 대한 재정립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물로 대표되는 이론이 '인간안보'(human security)이론이다.

한국말로 직역하면 조금은 어색한 이 이론의 핵심논리는, 안보라는 개념의 제자리 찾기로 요약되어 질 수 있다. 안보(security)가 사람들의 안전(secure)한 삶을 보장하기 위한 것인 반면, 개개인의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는 요소는 반드시 외세의 침입이나 위협이 아니라는 것이 '인간안보' 이론의 핵심이다.

'인간안보'의 주창자들 또한 그 구체적 주장에 있어서 여러갈래로 나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주장은 안보의 개념은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 그리고 복지’를 위한 것으로 재정립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 그리고 복지'는 스웨덴 등의 서구 사민주의에서는 공적영역에서 국가의 의무로서 사고되어졌던 반면, 영미 자본주의에서는 철저하게 개인의 능력과 재량에 맞겨져 온 것이 사실이다.

'대체복무'는 '인간안보' 개념에 합치되는 제도

방어와 공격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모든 국가가 자국민들의 안전을 위한 '방어수단'이라는 명분으로 군대를 운영한다면, 공격적인 전쟁은 하나도 없어야 하는데 실제 현실세계는 그러하지 못하다. 그것은 군대가 '평화'를 위함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이용되는 경우가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총을 들어야 함'은 결국 '누군가를 겨누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누군가를 겨누어야 함'은,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 '타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80년 광주의 역사와 세계 곳곳의 내전에서 알 수 있듯 때로는 '자국민의 안전'또한 위협한다). 따라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인류의 보편적 상생이라는 양심을 지키고자 군대 가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병역의 의무를 완전히 면제해 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들이 한결같이 요구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소외자들에 대한 봉사를 군복무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빈곤층과 노인층 장애인 등의 사회적 소외자들의 삶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안보라는 개념에서는 벗어날지 몰라도 인간안보라는 개념에는 더욱 합치되는 행동이다. 오히려 인간안보의 물적토대가 부족한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에는 국가가 지금껏 제대로 하지 못했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제도 또한 될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징병률의 현저한 저하를 낳게 된다는 것이 당장의 문제라면 대체복무 기간을 조정함으로써 이를 해결 할 수 있다. 이는 대체복무를 요구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 또한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이다.

물론, 장기적 시각에서는 모병제로의 전환과 대체복무제도 자체의 해소를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첫 걸음은 남북미 평화협정과 북미불가침조약 체결을 통한 남북간 신뢰구축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남북 평화군축으로 이어진다면, 모병제는 현실속에서 충분히 논의되어 질 수 있는 어젠다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에서도, 대체복무제도는 인간안보를 위한 실현수단으로, 양심의 자유라는 천부인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고려되어 질 수 있다.

계속되는 사회적 빈곤층의 자살은 한국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을 보여준다. 국민들의 안전한 삶을 위한 최소한의 여건 마련은 여전히 국가의 몫이라기 보다는 국민들 스스로의 몫으로 여겨진다.

총을 잡는 대신,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손을 잡으려는 이들을 탓할 수 없다. 이들의 대체복무 인정은 '안보'라는 개념이 어떠한 구체적 정책을 통해서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커다란 경험이 될 것이다.

문제는 사고의 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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