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속에는 이미 아줌마 계산기가 두드려졌다. 점심이 제공되니 김밥을 싸는 번거로움도 없을 테고, 비교적 아이들에게 시달리지 않으며 단돈 3만원에 관광을 나설 수 있다니…. 횡재한 기분이었다. 부여에 살면서도 아이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유명한 유적지 찾기를 게을리 한 터라, 이 기회에 지역 군민으로서 마음에 진 빚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주도에서 왔다는 가족을 포함, 모두 37명의 인원이 지난 2일 '사비장터 그린투어'에 동참했다.
첫 행선지는 낙화암과 고란사. 백마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낙화암과 고란사로 향했다. 진한 식혜 색깔의 백마강은 도도히 흐르는데 가이드를 담당한 공무원 김관식씨의 해설이 맛깔스러웠다.
"저기 낙화암이라고 새겨진 글씨 보이시죠. 조선시대 송시열 선생이 '궁녀들이 떨어지는 모습이 꽃잎과 같았을 것이다'라며 쓴 글씨입니다. 바로 저 글씨가 씌어진 시기부터 삼천 궁녀들이 떨어졌다는 이곳이 낙화암이 된 것입니다. 그 전에는 추사암 또는 타사암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라는 뜻이 시인의 손을 거쳐 '꽃잎이 떨어진 곳'이 됐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고 낙화암에 올랐지만, 피다 만 꽃 같을 삼천 궁녀들의 한 맺힌 원혼들 떠도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오히려 낙화암에서 시선이 직선으로 꽂히는 곳에 영화 <황산벌> 세트장에 더 관심이 쏠렸다.
다시 유람선을 타고 돌아오는 배 안에서 음주가무를 유도하는 듯한 트로트 음악이 흘렀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꿈꾸는 백마강>과 <백마강>이었다. 의도한 배경음악인 것이다.
익숙한 가락은 아니었지만 백마강 위에서 듣는 이 노래도 꽤 괜찮았다. 그 노래를 들으며 구드레 나루터로 돌아오니, 관광버스와 승용차들이 빼곡한 것이 사람들로 붐볐다. 모두가 부여를 찾는 관광객들이라는 사실에 괜히 내가 다 뿌듯해졌다.
다음 코스는 박물관 견학이었는데, 잘 손질돼 유리벽 안에 갇혀 있는 유물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다만 김씨의 해박한 지식에 바탕한 설명과 이에 곁들어진 유머에 사람들은 그의 뒤를 놓치지 않고 잘 따라 다녔다.
덕분에 요즘 환자들이 병원에서 쓰는 것이라도 해도 믿었음직한 백제시대 변기를 그냥 지나치지 않을 수 있었고, 부여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백제 금동대향로 진품을 접하며 그것이 간직하고 있는 숨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점심으로는 일반 식당에 갈비탕을 준비했는데, 농촌 체험을 하는 곳에서 그 지역의 소박한 식사를 접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런 서운함을 보완하려는 듯 주최측은 부여의 특산물인 굿뜨래 아침 딸기 한 접시를 제공해 참가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오전의 여정이 문화 관광이었다면 오후의 일정은 체험 코스로 짜여져 있었다. 5살 딸아이가 점점 싫증을 낼 즈음, 곤충 농장을 방문해 아이들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 "아직 애벌레 상태로, 성충을 보여줄 수 없어서 서운하다"는 임태교 사장님의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 하늘소 등의 애벌레 즉, 굼벵이를 보았다.
오전의 일정에서는 마지못해 따라오는 듯 했던 아이들은 임 사장님이 애벌레를 한 마리씩 잡아 보라는 말에 서로 먼저 해보겠다며 야단법석을 부렸다. 소심해서 애벌레 따위는 절대로 못 만질 줄 알았던 아들 녀석은 단번에 두 마리를 잡아서 의기양양했다.
곤충 체험장에 머무는 동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음 일정이 고구마 심기였는데, 운영진들이 난감해 하는 눈치였다.
"원래 고구마는 비 오늘 날 심어서, 비 안 오는 날 캐야 맛있는 고구마가 되는 겁니다. 우비와 장갑 다 준비해드립니다" 하는 안내자 김관식씨의 말에 일행들은 웃으며, 기운을 북돋았다.
일행들은 빨강, 파랑, 노랑 우비를 입고, 검은색 비닐 봉지로 신발을 감싼 이상한 패션으로 축축한 고구마 밭에 들어섰다. 마치 불시착한 외계인들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이를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빗속에서도 다들 어찌나 고구마를 잘 심는지 호미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넘었다. 그 사이 가족 이름과 주소 등이 써 있는 팻말을 각자에게 배정된 밭고랑 앞에 세우는 것으로 그 날의 일정이 끝났다.
낙화암과 박물관을 다녀오는 것만으로 군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 했는데, 곤충 체험 학습장과 고구마 심기까지 덤으로 얻었다. 처음 하는 행사라 다소 미비한 점이 있기는 했지만, 부담되지 않는 가격으로 가족들과 짜임새 있는 하루를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각 지자체마다 고장의 특성을 살린 그린투어가 활성화되고 있다. 문화 유적 탐방과 농촌 체험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부여의 그린투어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