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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맘때 어버이날을 맞아 아이에게 꽃을 받으면서도 늘 마음 한편이 불편하다. 멀리 계신 부모님께 꽃 한 송이 달아드리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시어머님께는 이제 다시 그 옷자락에 꽃을 달아드릴 수 없게 되었다.

어느새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지도 거의 한 달이 지났다. 이렇게 좋은 계절에 어머님이 안 계신다. 어머님은 시골에 살면서 이따금씩 친목계에서 여행가는 걸 무척이나 행복해 하셨던 분이었다. 어머님은 지난 4·15 선거일에 평상시와 다름없이 하루를 보내시고는 늦은 오후에 심근경색으로 별세하셨다. 회갑을 보낸 지 겨우 두 달이 흘렀을 뿐이었다. 주변에서는 '인생은 육십부터라는데 어찌 그리 일찍 가셨냐'며 모두들 안타까워했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통화할 때도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잘 웃으셨고 다 괜찮다고 하셨다. 아범은 요즘 무슨 일을 하기에 매일 야근이냐고 물어보기도 하셨다. 그 음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모 식품회사에서 자장라면 보내기 이벤트를 하기에 어머님이 생각났다. 아버님이 외출하시고 아이 삼촌도 출근하고 나면, 어머님은 어쩌다 가끔씩 점심에 자장라면을 즐긴다고 하셨다. 짧은 편지와 함께 자장라면을 보내드렸다. 그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문상을 오셨던 이웃집 아주머니는 그 작은 선물에도 어머님은 웃으며 자랑을 하셨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뵈었던 어머님은 화장을 곱게 하고 있었다. 미리 준비를 하셨는지 그 전날 파마까지 예쁘게 하셨다. 그렇게 꽃신을 신고 꽃상여를 타고 논두렁 밭두둑을 지나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셨다. 나는 눈물을 쏟으며 그저 '죄송하다'는 인사만 계속했다.

살아 계실 때도 멀리 사는 둘째 며느리인 나는 '죄송하다'는 인사를 자주했다. 생각만큼 전화도 자주 못 하고, 자주 찾아 뵙지도 못했던 까닭이다. 나중에는 잘 모시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아범이 돈 많이 벌어 여유가 생기면 그때 호강 시켜드려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머님은 아무 예고도 없이 그렇게 떠나셨다.

큰 일을 치르면서 가족들이 하나가 되었다. 장독대에 가득 담아놓은 된장과 고추장을 나누며 이제 어디 가서 어머님의 손맛을 볼 수 있을 지를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어머님을 보내고 나서 오히려 더 각오를 다지게 된다. 남아있는 아버님과 식구들을 더 잘 챙겨야겠다. 늘 어머님이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사십구재에는 카네이션 한 다발을 안고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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