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하는 거, 그래. 벙어리. 여기서 나 벙어리 된 것 같아."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독립국가연합(CIS) 지역 고려인·독립운동가 후손 환영 행사에 참석한 김엘리자베타(76·타지키스탄) 할머니는 '고려말'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며 답답해 했다. 겨우 생각난 몇 마디로 김 할머니는 기자에게 "동무는 고향이 어딘가?"라고 물었다. 서울이 고향이라는 답에 그녀는 뜻모를 한숨을 깊게 쉬었다.
김엘리자베타 할머니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김알렉산더는 지방경찰서장으로 일했고 어머니 크반자다는 전업 주부였다.
아버지 김알렉산드르는 1933년 어느날 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끌려갔다. 1941년까지 아버지에 대한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하다가 1941년 카자흐스탄 키질 오다시에서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에게 씌워졌던 혐의가 무죄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1년만에 그곳에서 죽었다.
1937년 9월의 어느날. 한국인 공동 농장에서 생활하던 김엘리자베타 할머니의 가족들 앞에 차가 나타났다. 거기에서 내린 사람들은 할머니 가족들에게 개인 소유물을 소지하지 말고 무조건 차에 타라고 지시했다. 가족들은 거의 한달 동안 기차를 탔고 같은 기차에 탔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기차역에 버려졌다.
1937년 소련의 강제 이주 정책은 김엘리자베타 할머니의 삶을 고난 속으로 빠트렸다. 학교는 초등학교 2학년까지만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할머니는 두번 결혼을 했지만 현재는 자녀들과도 연락이 끊겼다. 그래도 민간 요법을 배워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 치료를 해주며 남은 삶을 의미있게 채워가고 있다.
강제 이주로 한인들의 비극이 시작
"1937년 8월 21일은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이 날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지도부가 극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대거 이주시키기로 결정한 날이다. 이 결정으로 소련 전체주의 체제하에 생활하고 있던 일부 소수 민족들을 대규모로 강제 이주시키는 메커니즘이 태동되었다."
카자흐스탄 법률대 교수인 한구리(73) 박사는 당시 소련 한인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강제 이주에 대해 소상히 설명했다. 1937년 8월 21일 일본의 간첩 행위가 극동 지방에 침투하는 것을 저지한다는 명분하에 한인들은 '지체없이' 강제 추방됐다. 강제 추방을 명령하는 스탈린 서기장과 소련 연방 인민위원회 몰로토프 의장 명의에 명령서 한 장으로 한인들은 졸지에 일본의 스파이가 됐다.
당시 많은 한인들은 "스탈린이 이와 같은 결정을 했을 리 없으니 스탈린에게 직접 탄원서를 보내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고. 강제 이주는 가을에 이루어졌으며 한인들은 옷과 신발, 식량도 없이 낯선 곳에 도착해 많은 이들이 병과 추위로 사망했다.
강제 이주된 한인들과 그 후손들은 시민권과 정치적 권리도 상실한 채 살아야 했다. 50년대 중반까지 한인들의 여권 특기 사항난에는 빨간 도장으로 '카자흐스탄 국경 내에서만 거주가 허용된다'는 내용이 찍혀 있었다.
카자흐스탄이 독립국임을 선언한 이후 한인들은 사회에 새롭게 기여하며 명예를 회복해가고 있다. 그러나 강제 이주 과정에서 상실한 문화와 언어는 쉽게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한구리 박사 역시 떠듬떠듬 우리말을 이어가며 '고려말'이 서툰 것을 부끄러워했다. 한 박사는 "구 소련에 있던 고려인들의 습관과 말을 연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며 초대해 준 재외동포재단에 고마움을 표했다.
고려인 한많은 눈물 닦아 주고파
강제 이주, 이유 없는 수감, 소수 민족의 언어와 문화 말살 정책 등으로 인해 고난의 삶을 이어온 독립국가연합(CIS) 지역 고려인,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고국을 찾았다. 재외동포재단(이사장 이광규) 초청으로 이뤄진 이번 방한은 5월 6일 올림픽 파크텔의 환영 행사를 시작으로 12일까지 일주일 동안 현충원, 정동극장, 독립기념관, 경주 관람의 일정으로 진행된다.
방한단은 러시아(7명), 블라디보스톡(8명), 우즈베키스탄(3명), 타지키스탄(1명), 카자흐스탄(2명), 키르키즈스탄(2명), 우크라이나(2명)의 고려인들로 독립운동가 후손, 강제이주자, 반공포로, 동포사회 기여자들로 구성돼있다.
유공인사로 초청된 우크라이나의 마가이 올렉산드르(58)씨는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외증손주로 구 소련 시절 컴퓨터 분야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인공지능 및 알고리즘 분야에서 훈장을 수상했다. 우크라이나공화국 건축산업청 청장으로 14년 역임한 김빅토르(79)씨는 건축전문가로 영예표창과 훈장을 여러 차례 수상했다.
카자흐스탄의 윤세르게이(81)씨는 레닌 훈장과 10월혁명 훈장을 받은 바 있으며 바스토빈스크 농업구역에는 그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한 '윤 세르게이 그리고리예비치'라는 거리가 있다. 강제 이주 생존 1세대인 박 알렉산드르(72)씨와 <스탈린 정치 탄압에 희생당한 고려인 명단집>을 낸 구스베틀라나(68)씨는 러시아에서 온 독립유공자 후손이다.
8일에는 오전 9시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방한단들의 고난사 발표회가 열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