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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여신 람누스는 나르시스에게 재앙을 내렸다. 그로 하여금 자신만을 사랑하게 한 것이다. 어느날 나르시스는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빨려 들게 된다. 그것에 매료되어 그는 자기 자신과 꼼짝도 못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랑은 결코 만질 수도, 이룰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샘물가를 떠나지 못하다가 결국 그 곳에서 목숨을 다하게 된다.

영어의 지나친 자기 도취, 즉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이 나르시스의 기구한 운명을 그린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했다. 오늘날에도 그 신화와 비교하여 볼 때 유형과 모양새는 다를지언정 여러 형태의 나르시시즘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샘물가에서 죽어 결국 수선화가 되었다는 이 나르시스의 이야기를 떠올리던 중 불현듯 우리 나라 사람들의 애국심이 생각났다.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들썩거릴 무렵이다. 그즈음 나는 런던에 살면서 분을 삭혀야만 했다. 열광적인 축구팬인 내가 그 불꽃 같은 현장에서 유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그 현장에 함께 하진 못했지만 모처럼 나는 우리 나라 축구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또 BBC채널을 통해 우리 나라 축구에 대한 외국 전문가들의 날카롭고 신선한 해설들을 종합해 볼 수도 있었다. 그런 연후 나는 국내 인터넷 사이트에 월드컵 한국축구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올린 바 있다.

그러나 그 이후 나는 곧 매국노로 둔갑되어 버렸다. 나의 글이 월드컵 4강의 대위업을 깎아 내리는 일종의 매국행위로 치부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올린 글 밑에는 차마 입에 담기 조차 힘든 욕설과 비방글이 굴비처럼 달려 있었다. 그러나 나를 정말 안타깝게 만들었던 것은 그러한 글들 속에서 감정적 대응이나 비난 이외에 합리적 비판이나 건설적 반론을 발견하기가 참 힘들었다는 점이다.

이런 일들을 겪게 될 때마다 나는 우리 나라 사람들 상당수가 이러한 자아도취적 애국심에 취해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흡사 집단적 주술처럼 말이다. 그리고 왜 유독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그러한 특성이 강하게 내재하고 있는지 자문해보게 된다.

사실 이러한 형태의 애국심은 여러 나라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고 크게 두 가지 유형을 띠고 있다. 예컨대 미국으로 대표되는 다민족국가에서 국민통합을 유도하고 국가형성을 촉진하기 위한 경우이거나, 독재 정권이 들어선 국가에서 체제유지를 공고히 하고 획일적 통치를 담보하기 위한 수단인 경우에 그러했다.

이러한 정권 하에서 우리 것에 대한 비판은 대개의 경우 원천 봉쇄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렇다면 단일 민족인 우리의 경우에는 개발독재 정권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병리 현상들이 민주사회를 이룩했다고 하는 요즘까지도 그 효력을 떨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유신 독재정권 말기에 나는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 체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문제 삼는 것 자체는 곧 감옥행을 의미했다. 또 외부세계에서 우리에게 가하는 비판은 대부분 각색되어 전달되거나 보도자체가 금지될 수 밖에 없었던 암울한 시기였다. 우리 체제에 대한 비판이 번져나가 자칫 정권의 존립 자체를 흔들 것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많이 변했다. 영구 존속을 획책했던 독재 정권들은 박물관 속으로 들어갔고 이제 민주주의의 대명천지가 열렸다. 이제는 체제나 국가지도자에 대한 비판마저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이른바 언로의 소통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나 체제에 대한 어떠한 성역도 사라지고 의사소통의 수위가 한층 높아져 있다는 말이다.

반면 이러한 언로의 개방시대에 있어서 아직도 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즉, 우리의 문화나 관습 그리고 한국성(韓國性)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아직도 상당히 방어적이고 폐쇄적인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때로는 이것이 지나쳐 우리 스스로 우리 것들에 매료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을 떨치기가 힘들다.

예컨대, 누군가 한국인은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직선적이며, 또 냄비근성을 갖고 있으며 끼리끼리 패거리를 짓는 성격이 강하다고 이야기 한다면, 이것을 문제제기로 받아들여 냉철한 담론 전개나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개선책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무슨 악의적 비난이나 우리에 대한 모함으로 치부하기 일쑤다.

여기에 더해 그 비교대상을 일반적 일본 사람들(극우파 등이 아닌)로 한정하려 한다면 아마도 마녀사냥식 몰매질을 당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제 체제에 대한 비판이 자유로워진 것처럼 한국성 내지 우리 것에 대한 비판에도 좀 유연해지고 귀를 열어 경청할 필요가 있다. 애국의 방법론에 있어서도 무조건적으로 "아 대한민국!"을 외치며 찬양을 하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의 못난 것들, 우리 관습과 문화의 부끄러운 것들 그리고 한국인들의 지저분한 것들까지 과감히 도마 위에 올려 놓고 잘라 낼 것과 보존해야 할 것들을 냉철히 구분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또 우리끼리만 의견을 교환해 애국심을 고취하려기보다는 타자의 눈에 비친, 그러나 우리에겐 생경한 우리들의 모습을 겸허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귀 기울일 이야기가 있다면 경청하되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고 있다면, 또 진한 화장을 하고 거울 앞에 앉아 온갖 표정을 연출하고 있다면 이제 그 거울을 깨고 그 자리에서 일어서야 한다. 그리고 타자가 관찰하고 그린 내 모습을 찾아나서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글로벌 시대의 자기 모습 관찰법이며 복수의 여신 람누스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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