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때 <조선일보>가 새해 1월 1일자 신문에 일본 왕 부부의 사진과 일장기를 실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 제호 아래에 '황국신민의 서사(誓詞)'가 적혀 있다는 사실은 잘 안 알려져 있다. 사진에서 보듯 조선일보 제호 아래에 '황국신민의 서사'가 잘 나와 있다. 그러면 이 '황국신민의 서사' 내용은 무엇이고,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황국신민의 서사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들은 황국 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자.
2. 우리들 황국 신민은 서로 신애 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자.
3. 우리들 황국 신민은 인고 단련의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자.
'서사'는 우리가 쓰지 않는 낱말인데 그 뜻은 '맹세'쯤 될 것이고 '신민'은 신하라는 뜻이고, '황국'이라는 낱말은 일본을 가리킨다.
이 '황국신민의 서사'는 1937년에 만들어졌으며 일제는 모든 조선 사람들에게 이것을 외울 것을 강요하였고 학교 조례 시간뿐만 아니라, 관공서, 은행, 회사, 공장 등 모든 직장의 조례 시간이나 모임 때 반드시 외우게 하였다.
'황국신민의 서사'는 조선인도 '황국 신민'으로 일본 '천황'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점을 늘 외우게 함으로써 우리 민족을 말살하고 일제 식민 지배에 순응하는 노예로 만들려는 '황국 신민화 정책'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 당시에는 또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일본말만 쓰도록 강요하였으며 이른바 내선일체와 황국 신민화를 강화하던 때였다.
'황국신민의 서사'는 이각종과 김대우가 만든 듯
자료에 따르면 '황국신민의 서사'를 기획한 곳은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 학무국 촉탁으로 있던 이각종이 문안을 만들고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이던 김대우가 관련 업무를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1937년 10월 2일 미나미(南次郞) 조선총독의 결재를 얻어 공식 공포됐다.
이각종은 1919년 김포 군수가 되었고 그 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을 지내는 등 일제 때 높은 자리에서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였다.
이각종은 1949년 3월 4일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이각종에 대한 첫 공판은 6월 2일 열렸다. 그런데 이각종이 노래를 부르고 이상한 몸짓을 하는 바람에 재판이 진행되지 못하고 중단되었으며 그 뒤 정신이상을 이유로 보석되었다.
한편 김대우는 1928년 평북 박천 군수가 되었고, 그 뒤 총독부 사회교육과장, 경남 참여관 겸 산업부장, 경북 도지사 등 높은 자리에서 친일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해방된 뒤 1960년 7월 29일 제5대 총선 때는 경남 양산(제 22 선거구)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기까지 하였다. 무소속 임기태가 당선되고 김대우는 떨어졌지만 정말 어이가 없다.
그런데 김대우에 관한 선관위 자료를 보면 더 기막힌 일이 있다. 일제 때 경북 도지사로 친일 부역했다는 경력을 버젓이 적어 놓고 있는 것이다. 친일파도 이쯤 되면 정말 완전히 '막가파'라 아니할 수 없다 (서울대학 후원회장은 무슨 말인지 확실히 모르겠다).
지금도 나이 드신 분들은 이 '황국신민의 서사'를 잘 기억하고 있다. 기자도 어릴 때 집에서 이에 관한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른바 '민족지'라고 주장하면서도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호 바로 밑에 실은데 대해서는 전혀 반성하지 않는 <조선일보>, 그리고 '황국 신민의 서사'를 만들어 우리 민족 말살에 앞장선 이각종과 김대우가 해방 뒤에 보인 더러운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