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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이 제100회 정기공연으로 올린 창극 <심청전>을 보기 위해 장충단 공원을 지나서 국립극장으로 가는 길은 제법 굵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디 가서 뜨끈한 국물 한 사발에 추운 속을 덥히고 싶은 약간 쌀쌀한 날씨였다. 나는 전통창극 <심청전>이 내 빈 속을 데워줄 따끈한 국물 같은 공연이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졌다.

저녁 7시 30분 정각 막이 올랐다. 곽씨 부인이 태몽을 꾸는 대목으로 극은 시작 되었다. 출천 대효 심청이 태어나고 곽씨 부인은 산후 병증을 얻어 세상을 떠난다.

망자를 북망산으로 이끄는 요령 소리는 "땡기랑, 땡기랑" 슬피 울고 상여를 메고가는 상두꾼들의 "내가 죽어도 이 길이요, 자네가 죽어도 이길이로다. 어화넘차 너허넘 어허너어허 넘차 너화넘" 상여소리는 구성지고 심 봉사의 복통단장성은 관객의 애간장을 녹였다.

그러나 극은 약간 지루하게 느껴졌다. 스토리는 뻔한데다 극의 배경 음악으로 깔린 중모리 장단은 느슨하기만 했다. 그렇게 지루하게 진행되던 극은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장면에 이르러서야 그 역동성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 심청이 인당수 빠지는 대목(심봉사의 통곡과 오버랩 되어 보인다)
ⓒ 국립극장
샤(영상을 투사해주는 하얀 망사천)에 비치는 물결의 깊은 출렁임과 굿거리 장단에 얹힌 <뱃노래>의 씩씩하고 율동적인 가락이 극을 아연 활기차게 했다.

"범피중류, 둥덩실 떠난간다. 망망헌 창해이며 탕탕헌 물결이로구나."
"풍"


심청이 인당수 깊은 물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1부는 막을 내렸다.

관객들이 주최측에서 야참으로 제공하는 한 접시의 떡을 맛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는 동안 연출가 김효경 교수를 찾아가 짧은 인터뷰를 시도했다. 장님이 만진 것은 코끼리의 어느 부분이었던가.

20여분 간의 휴식 시간 후 2부가 시작됐다. 무대의 전면을 가리고 있던 샤가 뒤로 물러나 한 쪽으로 치워지면서 관극하는 시야가 좀 더 편안하게 트였다. 그래서인지 1부 보다 훨씬 배우들의 동작과 대사가 훨씬 실감있게 다가왔다.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난 심청은 환생하여 황후가 되지만 만단생각은 오로지 부친 생각뿐이라 심 황후는 산호주렴을 걷고 밖으로 나와 옥난간에 비껴서서 울음보다 진한 노래 한 자락을 토한다.

판소리 <심청가>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추월만정> 대목이 그것이다.

추월은 만정하여 산호주렴에 비치어 들고, 실솔은 슬피 울어 나유 안에 흩어질 적으, 청천의 외기러기난 월하에 높이 떠 뚜루루루루루루루 낄룩, 울음을 울고나니, 심황후 기가 막혀 "오느냐, 저 기럭아, 니 어디로 행하느냐. 소 중랑 북해 상으 편지 전턴 기러기냐?" 방으로 들어와 한 자 쓰고 눈물 짓고 두자 쓰고 한숨을 지니, 글자가 모두 수묵이 되고 언어가 도착아로구나. 편지 접어 손에 들고 하늘을 바라보니, 기러기는 간 데 없고, 창망한 구름 밖으 별과 달만 밝았구나. 심황후 기가 막혀 편지를 던지고 울음을 운다.

심 황후는 부친을 상봉할 요량으로 맹인 잔치를 배설토록 황제에게 청을 넣는다. 맹인 잔치에 참석하러 황성으로 가는 도중, 황 봉사와 뺑덕이네가 느끼한 수작을 건다든지, 급기야 눈이 맞은 뺑덕이네와 황 봉사가 야반도주를 한다든지 하는 우여곡절 끝에 심 봉사는 맹인 잔치 마지막 날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황궁에 도착한다.

이윽고 부녀 상봉 장면이 펼쳐진다.부친을 발견한 심 황후가 산호주렴을 박차고 버선발로 '우루루루루루' 뛰쳐나가 부친의 목을 끌어안고 통곡을 한다.

부녀상봉 대목(국립극장 사진)
부녀상봉 대목(국립극장 사진) ⓒ 안병기
"아이고, 아버지"
"아버지라니, 아버지라니, 누구요? 아이고, 나는 아들도 없고 딸도 없소. 무남독녀 외딸 하나 물에 빠져 죽은 지가 삼년인디 누가 잘 더러 아버지래요?"
'아이고, 아버지, 여태 눈을 못 뜨셨소? 임당수 깊은 물에 빠져 죽은 청이가 살아서 여기 왓소. 어서어서 눈을 떠서 청이를 보옵소서."


극은 절정을 향해 숨가쁘게 달려가고,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꿈이거든 깨지 말고 생시거든 어디 보자"라며 심청의 얼굴을 더듬더듬 만져보던 심 봉사 마침내 감은 눈을 휘번쩍, 눈을 뜬다.

눈을 뜬 심봉사,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노닐고 만좌맹인들이 덩달아 눈을 뜬다.

부녀 상봉, 그 뒷장면
부녀 상봉, 그 뒷장면 ⓒ 안병기
"얼씨구나 절씨구,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얼씨구나 절씨구 얼씨구 얼씨구 절씨구."

전통창극 <심청전>은 그렇게 끝이 났다. 국립극장을 나서는 내 마음은 관극이 던져주는 감동으로 설레었다. 그리고 그 감동으로 돌아서는 발걸음은 가벼웠던가를 생각한다.

관객에게 답례하는 배우들
관객에게 답례하는 배우들 ⓒ 안병기
전통창극 <심청전>은 김명곤 국립극장장이 인삿말에 썼듯이 우리 시대가 원하는 창극 만들기에 성공했는가. 미안하지만 이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올시다" 이다. 극이 노린 것이 점점 소홀해져가는 '효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계몽적인 것이라면 극은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는지 모른다.

구태의연한 스토리를 넘어설 수 있는 탄탄한 구성과 박진감 넘치는 극의 전개로 전통창극의 참맛을 맛보길 기대했던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하기엔 역부족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나름 대로 재미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비록 잠깐에 지나지 않았지만 장승상 부인 역을 출연해주신 오정숙 명창의 년부력강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었으며, 심 봉사 역을 맡은 왕기철이 <방아타령> 장면에서 보여준 은유적이고도 해학적인 몸짓은 절로 웃음이 나게 했으며, 국악관현악단이 직접 들려주는 생생하고 웅장한 음악 또한 색다른 재미를 안겨 주었다.

지루한 생은 참기 힘들다. 지루한 극(劇)은 더욱 견디기 힘들다. 막간 휴식을 포함해서 3시간이나 계속된 이 공연에서 가장 빛난 연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 지루함을 견디는 나의 인내심 어린 표정이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이번 전통창극 <심청전> 관극은 전통의 재창조라는 시대적 소명이 결코 만만치 않은 과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무대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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